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는 계절의 분위기도 조금씩 변해 간다.
짙었던 녹음 사이로 새로운 빛깔이 스며든다. 들, 산, 물은 한여름과는 달라진 표정으로 다음 계절을 예고한다.
폭염의 고비를 넘긴 뒤라 여행의 발걸음도 한결 여유롭다. 천천히 걷고, 오래 바라보며 지나가는 계절을 즐기기 좋은 때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여름을 떠나보낼 수 있는 풍경들을 골라 봤다.
[서울=뉴시스]김정환 관광전문 기자 =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한 송이가 100일 내내 피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꽃이 지고 다시 피기를 거듭해 100일 가까이 꽃을 보여 준다. 그래서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다.
‘대나무의 고장’으로 익숙한 담양에서도 여름 끝자락에는 배롱나무가 주인공으로 나서는 곳이 있다. 전남광주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명옥헌 원림’이다.
정자와 연못 주변의 배롱나무에는 진분홍 꽃이 피고, 그 너머로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 짙은 초록빛을 더한다.
명옥헌의 배롱나무꽃은 8월에 절정을 이루고 9월까지 이어져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찾기 좋다. 담양군도 명옥헌 원림을 9월 추천 여행지로 소개한다.
명옥헌 원림은 소쇄원과 함께 담양을 대표하는 조선 시대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면적은 1만3484㎡다. 2009년 국가 지정 명승이 됐다.
조선 제16대 인조(1595~1649) 때 예문관 검열을 지낸 오희도(1583~1623)가 자연을 벗 삼아 이곳에 머물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오이정이 부친을 기리며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파 원림을 가꿨다.
정자에는 ‘삼고’(三顧)라는 편액도 걸려 있다. 능양군(인조)이 조선 제15대 광해군(1575~1641)을 몰아내기 위한 1623년 반정을 준비하며 오희도의 동참을 청하려 세 차례 찾아왔다고 전하는 일화에서 비롯됐다.
명옥헌은 규모가 크지 않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로, 북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마루에 앉으면 연못, 나무, 주변 산자락이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정자 앞뒤에 각각 연못이 있다.
앞 연못은 가로 약 20m, 세로 약 40m의 네모난 형태로 가운데 둥근 섬을 뒀다. 네모난 못과 둥근 섬을 결합한 ‘방지원도’(方池圓島)는 조선 시대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조경 방식이다.
뒤 연못은 그보다 작지만 같은 방식으로 조성됐다.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뒤 연못을 채운 뒤 앞 연못으로 흘러간다.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이름도 물과 관련이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부딪치는 듯 들린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고 전한다.
정자 동쪽 계류의 바위에는 조선 제18대 현종(1641~1674) 때 좌의정을 지낸 송시열(1607~1689)이 1673년 이곳을 찾아 썼다고 전하는 ‘명옥헌계축’(鳴玉軒癸丑) 글씨가 남아 있다. ‘계축’은 1673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맘때 시선을 가장 오래 붙드는 것은 역시 배롱나무다.
명옥헌 원림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배롱나무 20여 그루가 자란다. 오랜 세월을 버틴 줄기는 굵고 굽었지만 여름이면 가지 끝마다 진분홍 꽃을 달아낸다. 흔히 길가에서 보는 어린 배롱나무와는 모습부터 다르다.
앞 연못 주변에 특히 많이 모여 있는 배롱나무는 바깥쪽 소나무의 짙은 초록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연못 가운데 둥근 섬에도 배롱나무가 터를 잡았다. 연못에서는 연꽃도 핀다. 정자에 서서 바라보면 배롱나무꽃의 진분홍, 소나무 잎의 짙은 초록, 연꽃의 연분홍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2016년 KBS2TV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박보검)과 '라온'(김유정)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명옥헌에서는 서둘러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천천히 자리를 바꿔 보는 편이 좋다.
연못 가장자리에서는 오래된 배롱나무의 굽은 줄기와 꽃을 살펴본다. 뒤쪽 작은 연못과 계류까지 올라가면 앞 연못과 또 다른 풍경을 만난다.
입장료는 없다.
마을의 혼잡을 줄이기 위해 차량은 마을 입구 주차장에 세워 둔 채 걸어가는 것이 주민들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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