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馬 이야기] 조선의 '국마장' 제주…잣담이 간직한 말의 역사

기사등록 2026/08/21 08:00:00 최종수정 2026/08/21 08:06:26

탐라순력도 산장구마 흔적, 1967년 항공사진과 현장서 확인

말 한 마리까지 장부 관리…동색마는 제주 백성에게 가혹한 부담

수백 년 말산업 역사성, 한국마사회 제주 이전의 근거로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15일 제주시 애월읍 노꼬메오름 자락에 남아 있는 상잣담. 숲속으로 길게 이어진 현무암 돌담은 조선시대 제주 목장의 위쪽 경계를 이루던 시설로 제주 중산간 목축문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2026.08.21. ijy788@newsis.com

제주는 오랜 세월 '말의 고장'’으로 불려왔다. 제주마는 섬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제주인의 삶과 함께해 왔다. 농경과 운송, 군사와 교통의 수단이었던 말은 마을 공동체의 생활문화와 풍속, 지명과 언어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시대가 바뀌면서 말의 역할과 사육 환경이 달라졌다. 제주마는 이제 역사적 유산을 넘어 생물자원과 문화콘텐츠, 승마·관광·교육산업을 연결하는 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제주인의 삶 속에 이어져 온 말문화와 제주마의 생태적·산업적 가치를 조명하면서 보존과 활용 현장을 찾아 제주마와 말문화 유산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한다.<편집자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15일 제주시 애월읍 노꼬메오름 자락. 숲길을 따라 들어가자 곧게 뻗은 삼나무 사이로 현무암 돌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이끼가 두껍게 내려앉았고 돌 틈마다 고사리와 작은 풀들이 뿌리를 내렸다. 어른 키를 넘을 정도로 높은 곳도 있고, 무너진 곳도 있지만 담은 숲속으로 길게 이어졌다.

지금은 나무에 둘러싸여 있지만 돌담이 처음 놓였을 당시에는 풍경이 달랐다. 넓은 초지에 수많은 말과 소가 풀을 뜯던 목장이었다. 숲속에 남은 돌담은 목장의 위쪽 경계를 이루었던 '상잣담(또는 상잣성)'이다.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한라산 중산간(해발 200~600m)을 거대한 목장으로 이용했다. 민가와 농경지 쪽에는 하잣담을 두르고, 우마가 한라산 고지대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위쪽에는 상잣담을 쌓았다. 이 잣담은 말을 기르고 관리하기 위해 땅을 나눴던 제주 목축문화의 흔적이자 국가가 운영했던 목장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유산이다.

제주사람들은 목장 경계인 이런 돌담을 '잣담' 또는 '잣'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1970년대부터 발간된 정부의 제주 지형도에 잣담을 '잣성'으로 표기하면서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1702년 그림 속 '산장구마'…1967년 하늘에서도 보였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43면의 화첩)의 '산장구마(山場驅馬)'는 조선시대 제주 목축의 규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에는 한라산 중산간에 방목하던 말을 한곳으로 몰아들이는 장면이 펼쳐진다. 당시 산장구마에 동원된 말은 2375마리였다. 말을 몰아오는 구마군 3720명, 임시 시설을 만드는 결책군 2602명, 목자와 보인(보조 역할) 214명 등  6536명이 한라산 일대에 흩어진 말을 한꺼번에 몰아 점검했던 국가적 규모의 행사였던 셈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말을 모으고 골라내기 위한 시설이다. 미원장(尾圓場)에 말을 모아놓은 다음 좁은 통로인 사장(蛇場)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하면서 수를 세거나 진상할 말을 골라낸 후 두원장(頭圓場)으로 보내는 것이다.

[제주=뉴시스] 1967년 항공사진(왼쪽)과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작한 탐라순력도의 '산장구마'. 항공사진에는 미원장과 사장, 두원장으로 이어지는 산장구마 시설로 추정되는 원형 공간과 통로의 윤곽이 남아 있다. (사진= 항공사진은 제주도 공간포털, 산장구마는 제주도 홈페이지 탐라순력도에서 각각 캡처) photo@newsis.com
1967년 항공사진을 보면 산장구마 시설로 추정되는 둥근 공간과 이들을 연결하는 좁은 통로의 윤곽이 땅 위에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공간 구성과 비교하면 상당히 유사하다.

지난 15일 직접 현장을 찾아갔다. 도로에서 숲으로 둘러싸인 목장길을 따라 500m가량을 들어가자 잔디를 기르고 있는 밭이 나왔다. 320여년전 산장구마의 두원장으로 추정되는 돌담을 잔디밭 경계에서 확인했다. 항공사진 속 두원장 공간 구조가 보였다. 돌담의 높이는 2m가 넘는 곳이 있으며 일부는 무너지기도 했지만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형태가 남아 있다.

그림과 사진 속에는 두원장이 원형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반원 형태다. 현재 확인되는 돌담은 반원형 구간 50m를 포함해서 160m가량 이어진다. 지적도상 경계는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반원형 돌담이 있는 쪽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반대편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속한다.

1702년의 그림, 1967년의 항공사진, 그리고 지금의 현장이 하나의 장소에서 겹쳐졌다.

현재 남아 있는 돌담이 18세기 초에 쌓은 것이라고 단정하기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만 탐라순력도에 기록된 산장구마의 공간 구조가 300년 넘는 시간을 건너 같은 자리에서 흔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제주 목축사에서 갖는 가치는 작지 않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15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경계에 남아 있는 산장구마 두원장 추정 공간. 현재는 잔디밭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숲과 맞닿은 가장자리를 따라 반원 형태의 돌담이 이어져 탐라순력도와 1967년 항공사진에 나타난 두원장의 공간 구조를 짐작하게 한다. 2026.08.21. ijy788@newsis.com

◆한라산을 거대한 국영목장으로 만든 조선

조선시대 제주 말 사육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국마장'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부터 말은 교통수단뿐 아니라 군사용과 외교용, 운송수단으로 이용한 핵심 자원이었다. 특히 많은 말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제주는 국가 마정의 핵심 지역이었다.

세종대에는 제주 목장 운영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1429년(세종 11년) 제주 출신 고득종 등이 한라산 일대에 목장을 축조해 말을 방목하도록 건의했고 조정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전까지 하천이나 오름 같은 자연지형을 목장 경계로 이용했다면 돌담이 만들어지면서 국가 목장의 영역이 땅 위에 분명하게 표시됐다. 목장 돌담은 단순히 말을 막는 시설이 아니라 국가 소유의 목장과 주민들의 생활공간을 구분하는 경계였다.
[제주=뉴시스] 18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제주삼읍도총지도'에 나타난 조선시대 제주 국마장. 한라산을 중심으로 중산간에 설치된 10개 소장의 경계를 실선으로 표시했다. 제주목은 1~6소장, 대정현은 7~8소장, 정의현은 9~10소장을 관할했다.  (사진=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제주삼읍도총지도에서 캡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후 제주 목장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10개의 소장(所場)으로 정비됐다. 1~6소장은 제주목, 7~8소장은 대정현, 9~10소장은 정의현에서 관할했다. 여기에 산마장과 청마장, 별둔장 등 여러 목장이 더해지면서 중산간 넓은 지역이 국가의 말 생산·관리 공간으로 이용됐다.

오늘날 제주에서 볼 수 있는 하잣담과 상잣담, 목장과 목장 사이를 가르던 간장(間墻)은 바로 이 거대한 국마장 체계가 땅 위에 남긴 흔적이다.

◆말 한 마리까지 장부로 관리한 '마정 시스템'

국마장은 단순히 넓은 초지에 말을 풀어놓는 목장이 아니었다. 조선은 사람에게 호적을 만들듯 말과 소를 우마적(牛馬籍)에 올려 관리했다.

1398년(태조 7년) 제주에서 작성된 우마적에는 말 4414마리, 소 1914마리가 기록됐다. 우마적은 감목관과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중앙의 사복시와 병조가 각각 보관했다. 제주에서 기르는 말의 상황을 중앙정부가 장부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던 셈이다.

목장을 움직이는 조직은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제주목사를 중심으로 목장 업무를 담당하는 감목관이 있었고 각 목장에는 마감, 군두, 군부, 목자가 배치됐다. 그 가운데 목자는 현장에서 말을 방목하고 돌보는 실질적인 노동을 담당했다.

제주 국마장의 규모는 시기에 따라 증감은 있었지만 많을 때 2만~3만마리, 적을 때 1만마리 안팎으로 사육됐으며 어승마와 연례마, 세공마 등 여러 명목으로 매년 수백마리가 제주에서 진상됐다.

제주에서 마정은 국가가 관리하는 핵심 업무였다. 제주목사가 섬을 순력할 때마다 말을 점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구축한 정교한 마정 체계는 제주 백성에게는 무거운 부담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동색마(同色馬)'였다.

국가 소유의 말이 죽으면 목자는 가죽을 벗겨 관아에 제출했고 관에서는 이를 마적에 기록된 말의 털빛과 대조했다. 관아에서 폐사 사실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목자는 같은 털빛의 말을 마련해 변상해야 했다. 같은 색의 말로 책임을 물었다는 데서 동색마라는 말이 나왔다.

문제는 가난한 목자에게 말 한 필의 값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컸다는 점이다. 제주목사 이형상이 1702년 조정에 올린 '제주민막장'에는 동색마의 폐해로 부모와 처자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 제주 백성들의 실상이 담겨 있다.

말 관리와 진상에는 구마군, 결책군, 목자 등 대규모 인력 동원도 뒤따랐다. 국가 입장에서 제주는 안정적으로 군마와 공마를 생산하는 핵심 국마장이었지만, 그 체계를 현장에서 떠받친 것은 말을 돌보고 목장을 지켜야 했던 제주 백성들의 노동과 희생이었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제주마 방목지에서 방목중인 제주마. (사진=뉴시스 DB) ijy788@newsis.com

◆국내 말 생산·공급의 중심지, 한국마사회 유치 근거

조선의 국마장 체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감목관제와 공마제가 폐지되면서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말과 제주를 연결하는 구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경마 시행과 말산업 육성을 담당하는 한국마사회는 1990년 제주경마공원을 개장해 제주마 경주를 시행하고 있다. 제주경마장과는 별도로 운영하는 제주목장은  217만㎡ 규모로 470개 마방을 비롯해 교배소와 동물병원, 조교용 주로, 육성조련아카데미 등을 갖추고 있다.

제주는 수백 년 동안 국가 말 생산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국내 첫 말산업특구인 데다 경마공원과 마사회 목장, 생산농가와 말 관련 시설 등 산업기반도 이미 형성돼 있다. 여기에 제주마와 목축문화, 잣담과 국마장 같은 역사문화 자원을 현대 말산업과 결합할 여지가 있다.

이 같은 역사·산업적 기반은 제주도가 한국마사회를 2차 공공기관 이전의 핵심 유치 대상으로 삼은 주요 근거이기도 하다. 도는 지난 5월 한국마사회에 본사의 제주 이전을 공식 제안했으며, 국토교통부에도 한국마사회를 1순위 유치 희망 기관으로 제시했다.

김영준 제주도 농축산식품국장은 "역사성만으로 공공기관 이전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마사회의 핵심 기능인 '말산업 육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주가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며 "한국마사회가 제주로 이전하면 말산업 정책의 현장성과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어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균형발전 취지와 국가 말산업 육성이라는 정책 목표를 함께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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