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예술센터 존폐문제, 이양구 작가 연극화
남산예술센터 우연 극장장은 23일 '소년이 온다'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휴먼 푸가'(Human Fuga·11월 6~17일) 등 '2019 시즌 프로그램' 6편을 공개했다.
'휴먼 푸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를 '푸가'라는 음악적 형식으로 풀어낸다. 푸가는 하나의 주제가 성부 또는 악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모방 반복되면서 특정한 법칙이 만들어지는 악곡이다. 반복과 변화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커다란 형식으로 마무리된다.
'휴먼 푸가'에서 형식의 중심이 되는 것은 오브제다. 극장 공간에 들어서면 80년 광주를 모티브로 한 설치 작업물이 도처에 놓여 있다. 소설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과 기억, 행동들은 극의 재료로 변주돼 새롭게 해체·조립된다.
한 작가의 원작은 2인칭 '너'를 서술 주체로 삼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공연은 이를 완전히 해체한다. 연출을 맡은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배요섭 연출가는 "소설은 활자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구현됐다. 그럼에도 왜 공연으로 하는가, 푸가라는 형식이 하나의 주제를 변주하는 것인데 소설을 읽으면서 그 구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내러티브 재현이 아닌, 소설이 했던 것처럼 사건을 바탕으로 해서 퍼포머의 몸이나, 오브제를 새롭게 변주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부연했다.
오래 전부터 한 작가와 예술적 공감대를 만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배 연출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올리지 않을 수 있어 공연하게 됐다"면서 "소설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라면 안 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소설로도 충분한데, 왜 연극으로 옮기느냐. 릴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제의식을 두고) 소설이 할 수 있는 방식이 있고, 연극이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사회적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다. 이렇게 릴레이식으로 다양하게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다. 그 지점이 한 작가와 맞은 부분이다."
2019년 시즌 프로그램의 막을 올리는 '7번국도'(4월 17~28일)는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을 연극이 어떻게 직시해야 하는가에 질문을 던진다. 남산예술센터 상시투고 시스템 '초고를 부탁해'를 통해 발굴된, 젊은 극작가 배해률의 첫 장막희곡이다.
희곡을 보고 작품에 빠져든 구자혜 연출은 "본격적으로 연극을 만들어온 것이 2014년부터인데 한국 현대사에 엄청난 이슈들을 연극으로 만드는 짐이 있었다"면서 "그 부담감이 때로는 원동력이 됐다. 작품은 사회적 참사에 관해 싸움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싸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전했다.
극단 코끼리만보와 공동제작하는 '명왕성에서'(작·연출 박상현, 5월 15~26일)는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앞두고 이를 기억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세월호 사고 당시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성 작품이다.
손원정 드라마터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기억을 극장으로 소환한다"면서 "남겨진 말들이 배우의 입과 말을 통해 재현될 때 망각과 기억이 가깝게 붙어 있는지, '잊으라'는 말이 거꾸로 '잊을 수 없어'라는 말인지에 대해 관객과 함께 감각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제8회 벽산희곡상 수상작인 서민준 원작 '묵적지수'(연출 이래은·6월26일~7월7일)는 달과아이 극단과 공동제작한다.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묵자와 초혜황이 모의전을 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작가의 연극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프로그램 중 다른 이유로 눈길을 끄는 것은 '드라마센타, 드라마/센타'(가제·연출 류주연·9월 18일~29일)다. 남산예술센터의 본래 이름은 드라마센터다. 1962년 개관했다. 미국 록펠러재단의 재정 지원과 당시 한국 정부의 설립 대지 지원, 서울예술대학 설립자인 동랑(東朗) 유치진의 사재가 투입됐다.
2009년부터 서울시가 서울예술대학교(학교법인 동랑예술원)로부터 연간 10억원에 임대해 오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이 남산예술센터라는 이름을 걸고 위탁 운영 중이다.
하지만 서울예술대학이 지난해 초 2019년 6월 계약을 종료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연극계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서울예대가 사립학교재단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드라마센터 건축과정과 토지확보 과정을 들여다볼 때, 태생적으로 공공교육기관이라는 주장이 불거지고 유치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등 다방면에서 쟁점이 불거지고 있다. 2020년까지 계약이 연장돼, 논쟁이 중단된 상황이다.
극작 작업 중인 이 작가는 "과거에 잘못된 행위를 다음 세대들이 어떻게 해석해왔는가, 공과를 엄격하게 다뤄 왔는가 등의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2시간 가량 소요된 시즌 발표의 절반 이상은 남산예술센터를 둘러싼 문제로 채워졌다. 지속에 대한 연극인들의 지지 발언과 함께 독립, 자율성을 놓고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특히 이양구 작가는 남산예술센터를 산하 단체로 둔 서울문화재단 김종휘 대표이사에게 독립, 자율성 보장을 청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남산예술센터와 서울문화재단의 또 다른 산하 공연장인 삼일로창고극장이 지역문화본부 극장운영팀으로 들어가면서 연극인들 사이에서 독립, 자율성에 대한 지적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남산예술센터와 삼일로 창고극장 운영은 굉장히 좋은 사례다. 다른 공공 기관으로 적용 확대되는 것을 추구한다"면서 "조직상 독립된 단위로 분리하겠다. 올해 안에 관련된 절차를 밟아서 마무리할 것"이라고 했다.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은 폴란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려 남산예술센터 가치를 강조했다. "바우만이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같은 소수 언어에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말이 있을 수 있다면서 보전을 강조했는데 남산예술센터 연극들 역시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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