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칼럼]군함도, 영화와 실제 사이

기사등록 2017/08/12 18:03:30 최종수정 2017/08/12 23:37:33
군함도 전경
【서울=뉴시스】김호경 사회부장 = 필자가 군함도를 찾아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년 반 전인 2010년 1월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함도의 존재는 우리 국민 대부분에게 전혀 안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군함도를 다룬 기사 역시 극히 희소하던 시절이었다. 일제 강제동원 문제를 탐사 보도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혹사당했던 일본 내 작업장 수십 군데를 취재하면서 그중에서도 전문가들 사이에 악명 높게 회자되던 군함도를 빼놓을 수 없었다. 2010년 1월19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항 터미널에 도착했다.

필자야 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편안하게 일본에 건너갔지만 70여 년 전 당시 징용 피해자들은 일본까지 이동이라는 첫 관문 자체가 죽을 고생이었다. 영화 <군함도> 초반에 황정민, 소지섭, 이정현 등 주인공들이 뱃멀미로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조선인들과 뒤섞여 일본으로 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이 탄 선박이 바로 관부연락선(釜關連絡船)이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약 320㎞ 구간을 오가며 대형 '전시 노예선' 역할을 했던 이 배의 '관부'라는 이름은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釜山)의 한자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실제 강제동원 피해 당사자들의 기억은 이렇다.

"배는 점점 심하게 흔들렸고 여기저기서 웩웩거리며 토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나 배 안에는 의사는커녕 약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수건을 입에 대고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큰 배였고, 이렇게 흔들려 보기도 처음이었다. 결국 나는 뱃속에 들어있던 모든 음식물, 아마도 똥물까지를 모조리 토해낸 것 같았다. 뱃속이 칼로 에이는 듯 아팠고 입에는 씁쓸한 쓸개물이 고여 있었다."(1927년 생으로 1944년 5월 사가현 가라쓰탄광에 동원됐던 이흥섭)

"울 어머니가 '우리 득중이 살아와야 할 텐데, 살아와야 할 텐데' 그라고. 연락선 배를 타고 밤새 울었당게. 그때만 해도 이렇게 많이 안 돌아 댕겼을 때라, 군(郡)에서 송아지 터트래기처럼 떼 나간 게로 많이 울었지. '내가 다시 한국에 돌아올라나, 울 어머니나 우리 동상은 못 보고 죽을라나' 그런 생각하고 내가 많이 울었지."(1926년 전북 익산시 웅포면 출생으로 1944년 2월 일본 기후현 미쓰이 광산주식회사 카미오카 광산으로 동원됐던 김득중)

국민 대다수가 까맣게 잊고 살았지만,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이 발령된 1939년을 전후해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수백만 조선인들이 제 터전에서 뿌리 뽑힌 채 강제 노역에 내몰렸다. 중일전쟁 이래 자국민 남성을 대거 전쟁터로 동원한 상태에서 일제가 가장 중요한 노동력 공급지로 조선을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들은 한반도 테두리 안에서 노무 수탈을 당한 '국내 동원'은 물론,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최남단 규슈 지방에 이르는 일본 본토 전역, 러시아의 땅 끝 사할린과 열대의 태양이 작열하는 머나먼 남양군도(南洋群島)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국외 동원'을 당했다. 1944년 사가현 가라쓰(唐津)탄광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이흥섭의 증언에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린 당대 조선인들의 비명과 몸부림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때 나는 청춘의 문턱에 올라선 열일곱 밖에 되지 않은 사내였다. 식민지에 태어났다는 숙명, 자신의 악운, 군국주의의 강권, 강제노동에 의한 자유의 박탈, 이런 압박들은 나의 몸뚱이를 짓이기고 있었다. 그것은 나 혼자 만에 대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몇 십만 징용인들이 겪고 있는 똑같은 운명이었다. 나는 개, 돼지만도 못한 이런 비인도적 처우에 대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놈들아!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어쨌다고 이런 곳으로 끌고 와 고생을 시키느냐. 그리고 내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작정이냐. 나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전쟁의 미치광이들이다.'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입술을 적셨다. 짜고 미지근한 액체를 소매를 끌어당겨 닦았다. 그러나 아무리 한탄하고 슬퍼해도 이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이흥섭, <아버지가 건넌 바다>, 광주, 1990.)

이처럼 조선인의 피와 눈물로 얼룩졌던 강제동원의 주요 현장을 탐방하는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나가사키는 잘 알려진 대로 히로시마에 이어 미군의 원폭 투하를 당해 무참히 파괴됐던 도시다.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일본인의 성지(聖地)'로 통하지만, 반대로 우리 국민 입장에서는 '한민족의 유형지(流刑地)'에 다름 아닌 곳이다. 원폭 투하 직전까지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 정부와 기업에 의해 이 대표적인 '군수도시'로 끌려와 죄수나 다름없는 혹독한 육체노동에 복무해야 했다.

군함도 근경
현지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다카자네 야스노리 대표(올해 4월 향년 77세로 별세)와 시바타 도시아키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았다. 나가사키항 부두 건너편, 즉 나가사키만 서해안 쪽에 거대한 조선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바타 사무국장이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게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 본사입니다. 1945년 패전 직전까지 저곳에 최소 4700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있었지요."

일본 본토에 숱하게 산재해있던 노무작업장 가운데 나가사키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크게 미쓰비시조선소, 다카시마탄광, 그리고 군함도 내 하시마탄광에 배치됐다. 모두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작업장이다. 일본 대기업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정경유착의 대명사로 꼽히는 미쓰비시그룹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 속에 사세를 확장하며 특히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중 군수산업으로 급팽창했다. 다카자네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가사키에서 미쓰비시는 다른 기업에 비해 세력이 큰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이지요. 경제 자체가 미쓰비시 조선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의 경제기반 세 가지가 관광, 수산, 그리고 미쓰비시입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태평양 전쟁 때 조선인 강제연행을 가장 많이 한 기업이에요. 노무자가 부족하면 몇 명이 더 필요하다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요. 일본 정부나 군 당국과 한 몸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고속여객선을 타고 10여 분 가자 조선소 전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육중한 크레인들 사이로 도크에 거대한 군함이 한 척 떠있는 게 보였다. 다카자네 대표가 말했다. "미쓰비시가 건조 중인 해상자위대 소유 이지스 구축함이군요. 일본에서 만드는 이지스 함의 30%를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제조합니다."

태평양전쟁 때 미쓰비시는 당시 세계 최대 전함으로 일컬어졌던 '일본의 자랑' 6만9000t급 무사시 전함을 비롯해 수많은 군사용 선박을 건조한 조선소, 일본군이 사용한 어뢰의 8할을 만들었다는 병기제작소, 그 밖에 제강공장과 각종 탄광 등 일제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던 작업장들을 나가사키 곳곳에서 가동했다. 나가사키는 전쟁의 주동력이었던 미쓰비시 군수산업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일본의 전쟁 거점에 수만 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투입됐다. 1944년 당시 조선인 노무자 및 그 가족이 나가사키시에는 2만 명, 나가사키현 전체를 통틀어서는 7만5000명이나 거주했다. 나가사키시 조선인 2만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미쓰비시 소속으로 조선소에만 4700여 명이 배치됐다. 박근혜 정부 때 활동이 중단됐던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제동원조사위원회 측이 녹취한 피해자들의 구술기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7층 높이에서 일했는데 저승이 어딘가 했는데, 죽어나오는 사람이 자꾸 날마다 몇이 나오거든. 전기하다가 감전돼 죽는 사람, 널쩌가(떨어져서) 죽는 사람. 그게 한정 없이 나옵니다. 날마다 죽어나오는 거를 예사로 보고 뭐. 내가 죽을 고비 한정 없이 넘겼어."(김종술·1922년생·경남 산청군 천평리)

군함도 근경
"나가사키조선소 가서 첨에 한 달 교육받는데 부소장이라 카는 사람이 우리한테 와가지고 '우리 조선소 와가지고 여러분들 기분이 어떠냐. 우리 조선소는 동양에서 최고 가는 조선손데, 전쟁 안 났을 거 가트면 한국 사람이라 카는 거는 도저히 일할 생각도 못했다. 지금은 우리가 내선일체니깐, 너희들은 우리 회사에 온 걸 큰 영광으로 생각해라' 이러더라고."(김성수·1925년생·부산 용호3동)

전시 때의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를 지나 30여 분 더 배로 이동한 뒤 다카시마(高島)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소형 선박으로 갈아타고 군함도, 곧 하시마(端島) 로 향했다. 다카시마에서 5㎞쯤 떨어져 있는 이 섬은 나가사키 징용자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작업장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잔인한 폭력이 육지와 철저히 고립된 광부들을 사투의 나날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외관상으로도 극도의 황량함이 섬 전체를 감돌았다. 보통 섬을 둘러싸고 자라는 울창한 숲이 이 섬 주변에는 없다. 모래가 깔린 해변조차 볼 수 없었다. 수목이 자라지 않는 불모의 섬. 오직 시멘트로 싸 바른 10m 높이의 방파제가 섬과 바다의 경계를 두르고 있어 자연이 아닌 인공 섬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섬 전체가 탄광으로 개발된 곳. 바닷속 지하 곳곳으로 수백 m씩 갱도를 파내려간 전형적인 해저탄광이다.

미쓰비시광업은 다카시마탄광에 이어 1890년 하시마탄광을 인수했다. 이곳 석탄은 순탄발열량이 높고 유황, 인의 함유량이 적은 최고급 탄으로 주로 제철이나 선박용으로 쓰였다.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면서 하시마탄광은 채탄량을 증가시키라는 심한 압박을 받았고, 이는 그대로 올가미가 돼 조선인과 중국인 노무자의 목을 조였다. 이곳에는 조선인 징용자 500명, 중국인 전쟁포로 200여 명이 강제노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몇 명 남지 않은 하시마탄광 생존자 가운데 박준구(1920년생·전남 순천시 장안리)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징용 갔더니 하시마에 있던 사람들이 '아이고, 당신들도 고생혀. 여기 온 지 3년 됐는데도 안 내보내줘서 이러고 있어. 여기 들어오면 못 나가요' 그래. 그 소리를 들응께 아이고메, 우리는 다 살았네, 아주 포기를 했어요···. 월급이 어디가 있어, 월급이? 밤낮 일만 하고. 식사라고는 주먹밥, 요만씩한 놈을 두덩이 줘. 그래서 탄광에서 워메, 우리 한국이 그렇게 좋았구나 싶은 생각이 나고. 말도 못해. 안 죽고 살은 것이 천운이지."

심지어 오호츠크 해 불모의 섬이었던 러시아 사할린 내 탄광으로 끌려갔던 징용자가 다시 일본 본토 최남단 규슈 지역 탄광으로 '전환 배치'를 당하며 군함도로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한 번도 감당하기 어려운 강제동원을 혹한(酷寒)에서 혹서(酷暑)라는 극과 극의 전혀 다른 환경 속으로 두 번째 당해야 했던 조선인들 심정은 '이제야말로 죽는구나' 이것이었다.

"거기서 어디 뭐 폭탄이 떨어지면(미군 전투기의 잦은 공습 폭격을 일컬음) 내빼야 되는데 섬이 되다 보니까 내뺄 데가 어디 있습니까, 헤엄쳐 나갈 수가 있습니까. 다카시마도 그렇고 하시마도 그렇고. 이제 죽었다···. 어찌나 벼룩이 많던지 밤새 뜯기고, 참 죽을 고생을···. 그래가 영양실조 안 걸리고 살아 왔는 게, 참 내 명이 길다고 생각합니다."(문갑진·1918년생·1941년 사할린 에스토루 기타코자와탄광으로 동원됐다 1944년 8월 일본 나가사키현 소재 미쓰비시광업 산하 하시마탄광에 전환 배치)

군함도 근경
징용자들은 매일 12시간씩 2교대로 노동했다. 승강기를 타고 수직갱도를 내려가 굴착장에 도착했다. 비좁은 막장에서 서 있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운 채 탄을 캐곤 했다. 매일 책임 출탄량(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나올 수도 없었다. 노무감독들은 모두 곤봉 모양의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1944년엔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조부) 당시 통상산업대신이 직접 시찰을 나왔다. 그는 "여긴 전쟁터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더 열심히 탄을 캐라"고 생산력 증대를 지시했다(패전 후 그는 A급 전범이 됐다).

이 섬은 멀리서 보면 군함 한 척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일본인 사이에 하시마라는 본명보다 '군칸지마(軍艦島)'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섬에 최대한 근접해 보니 과연 그랬다. 전체적인 지형도 그렇지만 그 위로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와 학교, 채탄시설들이 거대한 군함 형상을 이루고 있다.

군함도는 동서로 160m, 남북으로 약 480m 길이에 둘레 1.2㎞, 면적 6.3㏊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럼에도 탄광 개발이 진전되면서 한때 5300명이 거주해 일본 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구로 꼽혔다. 좁은 터에 최대한 많은 인원을 상주시키기 위해 7∼10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가 1944년까지 10여 동 세워졌고, 거기엔 주로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거주했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아파트에서 떨어진 두 동짜리 조악한 건물에 따로 수용됐다. 건물 창문에는 전부 쇠창살이 쳐 있었고, 부근에는 10m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포로로 잡혀온 중국인들도 있었는데, 이들 역시 별도의 숙소에 수용됐다.

섬을 반 바퀴 돌아 반대편 측면 쪽으로 접근하자 접안시설이 있는 부교 뒤편으로 컴컴한 동굴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시바타 사무국장이 알려줬다. "저기 보이는 문이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해서 '지옥문'이라고 불렸지요." 그것은 지하 700m까지 내려가는 해저탄광의 입구 가운데 섬 안에서 제일 큰 것이었다. 광부들은 거기서 철망으로 만든 승강기를 타고 까마득한 땅 밑 막장으로 내려가 절망과 싸웠다.

이들의 숙소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건물이라고 해도 창고보다 나쁘고, 바닥에는 썩어서 퉁퉁 불은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며, 화장실이나 목욕탕에서는 쓰레기통을 뒤적일 때나 나는 악취가 진동했다. 인간의 주택이라기보다 돼지우리에 가까웠다. 벼룩과 모기로 인한 고통은 징용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한 방에 25명씩 잤어. 크기가 학교 교실 한 칸 만 하대. 벼룩이 그렇게 많은 건 세상 처음 봤네. 아주, 이 벌판에 걸어가면 뛰어 올라와 아주. 기숙사에서도 침대를 이렇게 높게 만들어 놓고 잤어. 그렇지 않으면 자지 못해. 깨물어서. 땅에 시커멓게 있지. 그런 놈의 데는 처음 봤네."(양승우·1923년생·강원도 인제군읍 가리산리·1944년 8월 오카야마현 미쓰이조선 다마노조선소에 동원)

특히 탄광 동원자들의 경우에는 목욕탕에 대한 증언이 자주 나온다. 영화 <군함도>에서는 소지섭과 김민재(노무계) 간의 격투 신 배경으로 등장해 목욕탕 자체의 상태엔 주목하기 어려운데, 이에 대해서는 국내 문학사상 처음으로 강제동원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작가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에 잘 묘사돼 있다. 나가사키와 하시마 탄광을 주 무대로 한 한수산의 이 작품은 치밀한 현장 취재 및 방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2003년 해냄 출판사에서 다섯 권짜리 대작으로 선보였다가 지난해 창비에서 <군함도>로 개정 출간됐다.

군함도 '지옥문'
"우석은 젖은 머리를 털며 '된장국' 속으로 텀벙 들어섰다. 먹는 된장국이 아니다. 욕탕의 대형 욕조 속으로 들어서는 것을 된장국에 들어간다고들 말했다. 이 물이 이게 욕탕 물이냐? 미소시루(된장국)지. 묵은 때를 불리거나 더운물에 피로를 빠지게 하기에는 너무 더럽고 걸쩍지근할 정도로 거무튀튀했다. 수많은 인부들이 채 탄가루가 가시지 않은 몸으로 욕조에 들어가는 것이 원인의 하나이기도 했지만, 워낙 물이 부족한 시설로써는 탕의 물을 자주 갈아댈 수가 없었다. 욕탕에 대한 불만은 그래서 인부들의 가장 큰 불만의 하나로 늘 팥죽처럼 끓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이 짓이라도 하는 거지, 어느 놈이 이 물에 씻고 싶어서 씻는다더냐···."

'지옥섬'에서의 탈출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많은 조선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했다. 바다에 뛰어들어 무모하게 헤엄쳐 도망가다 빠져 죽고, 도중에 일본인 노무관리자들에게 잡혀 맞아 죽기도 했다. 일제 강제동원 실태를 앞장서 고발했던 서정우(2001년 별세)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열네 살 때 하시마로 징용됐습니다. 나는 매일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쉬면 감독이 와서 관리사무소로 끌고 가 마구 구타를 했습니다. '예, 일하러 나갈게요'라고 말할 때까지 린치를 당했습니다. 제방 위로 멀리 조선 쪽을 보면서 몇 번이나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동료 중에 자살한 사람이나, 육지로 헤엄쳐 도망하려다 빠져 죽은 사람이 40∼50명 있었습니다."

다카자네 대표와 시바타 사무국장은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선인 피폭자 문제, 나가사키조선소와 다카시마탄광, 하시마탄광 강제연행자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왔는데, 특히 1986년 군함도 한구석에 버려져 있던 '매화장인허증'(埋火葬認許證)을 무더기로 입수해 그곳에서 사망한 조선인이 1925년부터 45년까지 총 122명이고, 그중 강제동원기인 1938∼45년 사망자가 56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지역 관청이 발급하는 이 매장·화장 공문서에는 각 사망자의 신원, 사망일시, 원인, 매장 또는 화장 여부 등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는 조선인들 사망원인이 '병사' '익사' '발육불량' '역병' '변사' '자살' '추락에 의한 뇌진탕' '두개골 골절' '매몰로 인한 질식' '두부타박상' '복부내장 파열' 등으로 기재돼 있다. 자료를 직접 검토하면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비명에 갔는지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도망가다 물에 빠져 죽었거나 노무계에게 린치를 당해 숨진 조선인들의 한 맺힌 사연들은 이런 건조한 의학용어 속에 은폐돼 있다.

하시마는 1974년 폐광된 이후 거주자가 모두 떠나 아무도 살지 않는 완전한 무인도로 남았다. 남은 건물도 몹시 낡은 데다 일부는 무너져 내려 거대한 잿빛 폐허를 이룬다.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가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는 동안, 그리고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과거사에 눈을 감는 동안 참혹했던 강제동원의 진실은 망각의 늪으로 깊숙이 잠겨갔다.

거의 바닥까지 가라앉을 뻔했던 역사의 진실이 대중의 눈높이까지 수면 위로 인양되는 데 영화 <군함도>가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영화의 긍정적 덕목이야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만, 며칠 전 설레는 가슴으로 집 근처 극장에 들렀다가 정작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는 실망감이 상당했음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대부분을 섭렵한 팬임에도 그렇다.

김호경 사회부장
상업적 지향을 가진 영화라도(대중적 흥행을 원치 않는 영화가 있겠는가마는) '완성도'라는 잣대는 언제든 유효하다고 보는데 <군함도>는 놀라울 정도로 캐릭터의 전형성과 극적 설정의 신파성이 강해 작위적 감동에 이입하기가 매우 곤혹스러웠다. 징용 피해자들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영화이니만큼, 섬세한 리얼리즘과 절제된 구성으로 '일상의 고통'에 좀 더 천착하는 냉정한 앵글이었다면 심리적 조응과 울림이 훨씬 크고 깊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거의 같은 시점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역시 2차 대전기의 특정 실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군함도>와 비교해보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동일선상에서 대조하기는 여러모로 무리이겠지만 '감정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군함도>의 아쉬움이 두드러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실의 힘과 무게'를 살리는 데 있어 두 감독의 연출은 큰 차이를 보인다.

가상의 히어로형 주인공과 군중이 어우러진 대규모 액션으로 후반부에서 절정을 이루는 스펙터클 시퀀스 끝에 조선인들은 군함도를 집단 탈출하고야 만다. 사실과는 무관한 드라마적 설정을 감행했지만 그렇다고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소희를 비롯한 조선인 일행은 자신들이 가려는 나가사키 내륙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목도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영화는 그렇게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징용자들의 실제 상황은 어땠을까.

원폭 투하 당일인 1945년 8월9일부터 그해 12월31일까지 피폭 사망자가 나가사키시 전체에서 7만4000여 명이 발생했는데, 그 가운데 조선인 사망자는 1만 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군이 하필 나가사키를 지목해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을 투하한 것은 군수시설 파괴에 주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 타깃에 미쓰비시 조선소가 있었다.

"10시쯤 돼서 원자탄이 터졌는데(정확히는 오전 11시2분) 아이고, 고마 나무뿌리고 뭐고 싸악 다 뽑혀나가고 이러는데, 딱 우째해서 엎드렸어. 막 흙 같은 거 날아오고 돌 파편도 날아와서 맞아가지고 뭐 꼼짝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내 여기 허리 흉터가 있거든요. 흉터가 여 많이 있어요. 조선소 안에 병원이 있어서 40일 넘게 치료를 받았어요. 뼈가 상해가지고 꼼짝을 못했거든요."(배한섭·1926년생·경남 남해군 문의리)

"조선소에서 일하던 공장이 폭탄 떨어진 데서 3.2㎞ 떨어졌어. 폭발 직후 큰 철문에 깔렸는데 피가 얼마나 흘렀는지 옷이 뻘겋게 젖은 거예요. 그래서 살라고 기어나와서 병원으로 막 갔더니 병원은 맨 송장투성이라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 아주 뒤죽박죽 다 난리야요. 공장에 조선 사람이 한 2000명 있었지. 살아난 사람은 많지 않아요. 한 80%는 죽었을 거야. 한 놈은 얼굴이 홀랑 다 타버렸는데, 뭘 매길라면 입을 벌리지 못해서 참대(왕대)를 잘라서 입에다 넣어가지고 그 참대에다 밥을 이렇게 쑤셔서 넣었어요. 먹어야 사니깐 억지로 매길라고. 그러니깐 싫다는 거예요. '이 자식아, 넌 먹어야 살아! 먹어야 살아서 같이 나가지. 이 눔아!' 그러니께 막 성을 내더니 '너 이 놈의 자식, 나 낫기만 해봐' 그랬는데 결국은 죽었다구···."(김한수·1918년생·대전 용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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