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커피·교회 이어 아파트까지…두 달간 유출·침해사고 90곳 육박
숙박시설 이용일·시술 상담 등 민감정보까지 노출…비밀번호 바꿔도 남는 불안
사과문·피해 조회 반복에 지친 이용자…기업도 관리 사각지대
[서울=뉴시스]윤정민 박은비 기자 = #1. 직장인 A(29)씨는 미용의료 플랫폼 B사로부터 개인정보 유출 사고 알림 문자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 과거 코 성형 상담을 받고 시술 정보를 검색했던 기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름과 연락처 정도라면 비밀번호를 바꾸고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병원 방문 이력과 상담 내용, 사진까지 유출됐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사적인 기록이 어디까지 퍼졌을지 알 수 없다.
#2. 숙박 앱 C사로부터 개인정보 유출 안내를 받은 직장인 D(38)도 마찬가지다. 여행 예약을 위해 남긴 이름과 연락처뿐 아니라 숙박 상품명과 이용 날짜까지 유출됐다는 소식에는 불안감이 커졌다. 오래전 다녀온 여행 기록을 누군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생각에 찜찜했지만, 이미 유출된 정보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개인정보 유출이 일상화되고 있다. 인공지능(AI) 해킹이 보편화되고 있는 탓일까. 개정 개인정보보호법이 시행되면서 가중처벌을 피하려는 자진신고들이 크게 늘어서일까. 굵직한 정보 유출 사고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어진다.
대출을 알아보고 커피를 마시거나 기프트콘 선물을 보내면서 남긴 정보가 줄줄이 새나간다. 한 곳의 피해를 확인하고 나면 다른 곳에서 유출 안내가 날아오는 식이다.
사고가 발생한 곳은 달라도 안내문은 같았다. "고객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깊이 사과드린다", "계정의 비밀번호를 즉시 변경해달라", "출처가 불분명한 전화·문자·이메일에는 응답하거나 링크를 누르지 말라"는 내용이다.
기업의 사과는 반복되지만 후속 조치는 늘 이용자 몫이다. 유출된 정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비밀번호를 바꾸는 일도 직접 해야 한다. 처음에는 놀라고 대응했지만 이제는 "오늘도 털렸구나"라며 체념하는 분위기마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연락처나 계정 정보, 휴대폰 번호, 집 주소 뿐 아니라 혼인 경력·종교, 숙박 예약 내역과 병원 상담 기록 등 민감한 사생활 정보들까지 유출되고 있어서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참에 인터넷에 입력한 정보를 모두 없애자", "주민등록번호부터 초기화하자"는 자조 섞인 농담도 나온다. 지켜져야 할 '개인정보'가 이제 '모두의 정보'가 되고 있다.
◆은행·커피·대학·교회까지…두 달간 유출·침해사고만 90곳 육박
지난달 1일부터 이달 30일까지 기업·기관의 공지와 언론 보도 등을 취합한 결과 개인정보 유출 또는 침해사고가 공개되거나 확인된 곳은 90곳에 육박했다.
과거 SK텔레콤과 KT 등 주요 통신사 사고에서는 가입자 정보 악용에 따른 명의도용과 금융 피해 우려가 컸다. 금융권 사고 때도 신용정보와 금융거래 정보 유출이 주요 쟁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금융 거래와 무관한 일상 서비스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커피전문점 할리스에서는 2020년 2월 11일 이전 멤버십 가입자의 정보가 유출됐다. 오래전 포인트 적립을 위해 남긴 개인정보까지 뒤늦게 해커 손에 넘어간 것이다.
대학과 종교시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세대에서는 약 1만5000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추산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사랑의교회에서도 침해사고가 확인됐다.
지난 29일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예약 발권시스템 운영사와 진에어 시스템이 뚫려 항공기 고객들의 개인정보가 무더기로 유출됐다. 기프티콘 운영사 SK플래닛,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이 개인정보 유출 사실이나 정황을 알렸다. SK플래닛은 쿠폰 일련번호와 환급계좌 등의 유출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 모바일 쿠폰을 주고받고 환급받으며 남긴 정보까지 유출 우려 대상이 된 셈이다.
아파트 입주민 정보도 해킹 위협에 노출됐다. GS건설은 30일 일부 아파트의 커뮤니티 시설 예약 관리 시스템이 해킹당했다고 밝혔다. 이름과 연락처, 주소뿐 아니라 거주 유형과 세대주 여부, RF카드번호 등도 유출 가능 항목에 포함됐다.
문제는 유출 정보가 단순한 연락처나 계정 정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인의 생활 패턴과 민감한 사생활을 드러낼 수 있는 정보까지 있다.
놀유니버스에서 유출된 구 인터파크투어의 국내 숙소 예약정보에는 이름과 연락처 외에 상품명, 구매금액, 이용일자 등이 담겼다. 미용의료 플랫폼 '강남언니'에서는 국내외 이용자 약 22만명의 인적사항과 병원·시술·상담·사진·결제 관련 정보 등이 유출됐다.
지난해 혼인 경력과 가족관계, 학력 등이 유출된 결혼정보업체 듀오 사고에서 제기됐던 사생활 노출 우려가 다른 서비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사과는 반복되고 대응은 이용자 몫…기업도 관리 사각지대
유출 정보가 사생활 영역까지 파고들면서 이용자들의 피로감도 커지고 있다. 사고가 날 때마다 직접 피해를 확인하고 대응해야 하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경각심마저 무뎌지고 있다.
직장인 최모(30)씨는 쿠팡과 티빙, 공공자전거 '따릉이'에서 연이어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겪었다. 최 씨는 "쿠팡 때는 와우 멤버십을 해지하고 비밀번호도 바꿨다. 티빙 때도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자동결제를 해지했다"며 "따릉이에서도 또 유출됐다고 하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6개월간 6~7곳에서 개인정보 유출 안내를 받았다는 직장인 조모(29)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조씨는 "이제는 중요한 사이트가 아니면 유출 소식을 들어도 놀랍지 않다. 대신 어떤 정보가 빠져나갔는지 살펴본다"며 "탈퇴하거나 그냥 두기도 했지만 최근 결제 시도를 알리는 피싱 메일까지 받아 주요 계정의 비밀번호를 바꿨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나름의 고충을 토로한다. 사고를 막으려면 개인정보가 어느 시스템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하지만 관리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오래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쓰거나 외주 개발 후 관리자가 사라진 경우가 많아 보안 업데이트조차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최근 PHP 취약점 대응도 마찬가지다. 취약점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보안 패치가 배포된 지 열흘 가까이 됐지만 상당수 중소 기업들이 제 때 업데이트를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기업의 관리 책임이 남는다 해도 이미 빠져나간 정보를 이용자가 되돌릴 수는 없다.
유출 문자에는 무뎌졌지만 내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악용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여전하다. 오늘 받은 사과 문자를 닫고 나면 내일은 또 어디서 유출 문자가 올지 모르는 깜깜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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