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반장'과 '전원일기'로 시대 증언
박 반장의 고뇌부터 양촌리 김 회장의 '안으로 삼킨 웃음'까지
40년 초록우산 아동 후원·14년 팔도 '밥상'의 위로
카메라 너머 세상의 결핍까지 품어 안은 '진정한 어른'
국회·시민사회 아우르며 서민 곁 지켜
29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최불암(본명 최영한)은 시대의 결핍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반세기 넘도록 한국인의 원형적 표상을 체현해 온 배우다.
1939년생(호적상 1940년생)인 고인은 인천 제물포구(당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귀국한 부친이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과로로 요절하자, 큰아버지는 조카가 아비의 단명을 닮을까 저어해 '부처 바위'라는 뜻의 최불암(崔佛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머니는 1950년대 서울 명동에서 문인과 예술인들의 안식처였던 주점 '은성(銀星)'을 운영했다. 시인 김수영·박인환, 화가 김환기 등이 드나들던 그곳에서 어머니는 주머니 사정이 곤궁한 단골들의 자존심을 헤아려 외상 장부에 실명 대신 '코주부' '백대가리' 같은 별칭만 남겼다. 타인의 슬픔과 가난을 대하는 어머니의 이 속 깊은 환대와 배려는 훗날 고인이 연기 속에 불어넣은 온기의 토양이 됐다.
연출가를 꿈꾸던 청년은 서라벌예대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거쳐 1959년 극단 '실험극회'의 연극 '햄릿'으로 무대에 올랐고,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본격적인 연기 인생을 출발했다. 1967년 중앙방송(현 KBS) 특채 6기 탤런트로 발탁된 뒤에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노년의 김종서 역을 맡으며 일찌감치 노역(老役)과 인연을 맺었다.
고인을 한 시대의 초상으로 끌어올린 두 기둥은 단연 MBC TV '수사반장'(1971~1989)과 '전원일기'(1980~2002)였다.
이어 22년간 방영된 '전원일기'의 '양촌리 김 회장'을 통해 고인은 마침내 '국민 아버지'의 반열에 올랐다. 건넌방에 홀로 계신 노모의 마음을 헤아려 소리를 밖으로 터뜨리지 않고 안으로 삼키던 특유의 '파하~' 하는 웃음, 해진 러닝셔츠 차림으로 등허리를 긁는 생활밀착형 디테일은 한국적 가장의 초상 그 자체였다. 과거 한 신문은 그를 두고 "남성이 탈남성화하는 시대에 남성으로 버티고 있는 남성, '애비 없는 시대'의 애비, '사나이 없는 시대'의 사나이, '어른 없는 시대'의 어른"이라고 평했다. 22년간 부부로 호흡을 맞춘 배우 김혜자와는 한 시대를 풍미한 상징적 콤비였다.
이 같은 대중적 친근함은 1990년대 초반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유머집 '최불암 시리즈'라는 전무후무한 신드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권위적인 어른의 틀에 갇히지 않고 대중의 해학과 놀이 속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전 세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간, 당대 대중문화의 가장 친근한 아이콘이었다.
스크린에서도 영화 '만종'(1970), '영자의 전성시대'(1975), '최후의 증인'(1980), '바람불어 좋은 날'(1980),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100여 편에 출연하며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1979)과 영평상 등을 거머쥐었다.
1992년에는 각별했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권유로 통일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14대 국회에 입성했으나, 제15대 총선 낙선 뒤 본업인 카메라 앞으로 복귀했다. 1999년부터는 '좋은나라 운동본부'를 이끌었고, 2011년부터 14년간 '한국인의 밥상' 진행자로 전국 팔도의 흙 묻은 밥상과 서민의 삶을 구수한 목소리로 위무했다.
백상예술대상 TV·연극 부문 최우수연기상, 대종상 남우주연상, 국민훈장 목련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훈했다. 1972년 '수사반장'으로 처음 명예 경찰에 위촉된 이후 2024년에는 명예 치안정감(명예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승진 위촉됐다.
고인은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영면에 들었다. 지난해 3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14년간 온기를 불어넣었던 KBS 1TV '한국인의 밥상'에서 하차했다. 이후 재활에 매진해왔으나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했다. 유족으로는 1970년 백년가약을 맺고 평생을 함께해 온 동료 배우이자 아내인 김민자 씨와 아들 동녘 씨, 딸 동비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30일 오전 10시부터 조문객을 맞는다. 장례는 평생을 아동 복지에 헌신해 온 고인의 뜻을 기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엄수된다.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고 이수성·이낙연 전 국무총리 등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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