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고전 희곡, 현대 한국 배경으로 재해석
뉴욕 배경 대사에 객석 폭소…낯선 한국 무대에도 호응
공연장을 무대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둔 변화 눈길
[뉴욕=뉴시스]김주희 기자 = 투명한 유리집 한 채가 불을 밝히고 있다. 어둠이 내린 웅장한 공연장 속 덩그러이 놓인 탓인지 집은 더 작고 연약해 보인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다툰다.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연극 '벚꽃동산'이 16~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의 웨이드 톰슨 드릴 홀 무대에 오른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동산'을 사이먼 스톤 연출이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19세기 러시아 귀족 가문의 몰락을 파산 위기에 놓은 한국 재벌가로 옮겨왔다.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지만, 급변하는 사회 속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이들의 충돌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뉴욕 관객들도 낯선 배경에 거리감을 두기보다 무대 위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극은 아들의 죽음 이후 뉴욕으로 떠났던 송도영이 서울로 돌아오며 시작된다. 재벌 3세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지만 그가 떠나 있던 사이 집안의 사업은 크게 기울었다.
그러나 삶을 대하는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송도영과 그의 오빠 송재영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기는커녕 여전히 과거의 풍요에 젖어 막연한 낙관을 놓지 않는다.
이들과 달리 황두식은 어떻게든 현실을 바꿔보려 한다. 과거 이 집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자수성가한 기업가가 돼 있다. 위기에 빠진 송도영을 위해 집을 지킬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지만 남매는 그의 말을 귀찮아할 뿐이다.
황두식과 송도영의 대화는 두 사람이 현실을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황두식이 "현실 감각이 전혀 없어요. 다들 뜬구름 잡고 있다고요. 그냥 일이 저절로 풀릴 거라고만 생각하잖아요"라며 답답함을 쏟아내자 송도영이 "우린 항상 그랬으니까요"라며 태연하게 답하는 식이다.
급기야 "뭔가를 하세요. 뭐라도 좀 하세요"라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터뜨리는 황두식의 모습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작 위기에 놓인 당사자들은 느긋한데 이를 지켜보는 황두식만 애가 타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줄곧 웃음을 자아낸다. 여기에 배우들이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대사 곳곳에 유머가 촘촘히 배어 있어 심각한 순간에도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특히 극 중 송도영이 살다 온 뉴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객석의 반응이 한층 커졌다. 현지 관객에게 익숙한 풍경이나 생활상을 건드리는 대목에서는 더 큰 폭소가 나오기도 했다.
이처럼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작품의 맛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더욱 힘을 얻는다.
송도영 역의 전도연은 현실과 동떨어진 듯 천진하면서도 아들을 잃은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자유롭게 오간다. 웃고 떠들다가도 불쑥 아들의 기억과 맞닥뜨리는 순간에는 분위기를 단숨에 바꾼다.
그가 "나는 (세월을) 잘 피해온 것 같은데?"라며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거나, 딸의 연인과 키스한 뒤 "지금은 2026년이잖아"라고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대목에서는 관객들의 웃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반면 그가 슬픔을 내비치는 순간에는 웃음으로 들썩이던 객석도 금세 조용해졌다.
황두식을 맡은 박해수는 송도영과 그의 가족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갑갑함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처음에는 차분히 이들을 설득하다 점차 목소리를 높여가는 과정에서 박해수의 완급 조절이 더욱 빛났다.
손상규(송재영 역), 유병훈(김영호 역), 이세준(신예빈 역) 등 다른 배우들도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더하며 극을 단단히 받친다.
이번 공연은 2024년 서울에서 출발한 해외 투어의 마지막 무대다. 작품은 지난해부터 홍콩과 싱가포르,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관객을 만났다.
26일까지 뉴욕 공연이 열리는 웨이드 톰슨 드릴 홀은 약 5100㎡ 규모로, 천장 높이가 24m에 달하는 대형 공간이다. 이번 공연은 유리집의 배경이 된 흰색 벽을 세우지 않고, 드릴 홀의 높은 천장과 철골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 극장 자체를 무대의 배경으로 끌어들였다.
유리집 역시 별도의 무대 위가 아닌 드릴 홀 바닥에 놓였다. 공연장 벽에 걸려 있던 시계도 무대 배경의 일부가 됐다.
덕분에 거대한 공간을 배경으로 불을 밝힌 유리집은 상대적으로 더 작고 연약해 보인다. 송도영의 가족이 머물고 싶어 하는 세계가 그만큼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들이 붙들고 있던 세계는 사라진다. 끝내 현실과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한 채 송도영은 집을 잃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며 살아온 황두식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들어서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렇게 19세기 러시아에서 2024년 서울을 지나 2026년 뉴욕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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