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8집 '더 신 : 블리스'로 데뷔 6년 만에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첫 정상
결핍을 서사의 심화로 치환…'아이랜드' 번민 지나 해방의 낙원 선언
가상의 뱀파이어에서 현실의 헌혈로…K-팝 낭만주의의 이상적 전범
그룹 '엔하이픈(ENHYPEN)'이 여덟 번째 미니앨범 '더 신 : 블리스(THE SIN : BLISS)'로 마침내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9월5일자) 정상을 밟았다. 2020년 11월 데뷔한 이래, 약 6년 만에 거둔 첫 1위 기록이다. 상실과 결핍의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그 통증을 서사의 질료로 삼아 무대 위에서 가장 뜨거운 피를 돌게 한 소년들이 마침내 세계 대중음악의 중심에서 자신들만의 해방된 낙원을 선언했다.
◆'알을 깨는 투쟁'에서 시작된 문장 부호…'주어짐'과 '쟁취함' 사이의 번민
엔하이픈의 시작은 알을 깨고 나오는 치열한 투쟁이었다. 2020년 9월 엠넷(Mnet)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랜드(I-LAND)'를 통해 결성된 이들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현 하이브)와 CJ ENM의 합작법인 빌리프랩(하이브가 2023년 8월10일 지분 100% 확보)에서 닻을 올렸다.
당시 총괄 프로듀싱을 맡은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 속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명제를 프로그램의 뼈대로 삼았다. 동시에 방 의장은 아티스트를 단순한 상업적 상품이 아닌 고유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존중하며 성장담을 부여했다. 서로 다른 단어를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문장 부호 '하이픈(-)'에서 착안한 팀명처럼, 이들은 '연결'을 통해 서로를 발견하고 함께 자라나겠다는 지향을 품었다.
그러나 화려한 배경은 동시에 무거운 중력이었다.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후배라는 수식어는 기대인 동시에 양날의 검이었고,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데뷔해 팬들과 물리적으로 대면하지 못하는 단절의 시기를 견뎌야 했다. 데뷔 앨범 '보더 : 데이 원(BORDER : DAY ONE)'의 타이틀곡 '기븐-테이큰(Given-Taken)'에서 던진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쟁취한 것인가'라는 화두는 이들이 짊어져야 했던 실존적 불안의 출발점이었다.
엔하이픈은 이번 앨범 1위로 통산 7번째 '빌보드 200' 톱 10 진입 기록을 썼다. 앞서 엔하이픈은 지난 1월 미니 7집 '더 신 : 배니시(THE SIN : VANISH)'와 2024년 '로맨스 : 언톨드(ROMANCE : UNTOLD)'로 해당 차트 최고 순위인 2위를 두 차례 기록했다.
◆"엔진을 항상 켜둘게"…핸드볼경기장에서 스타디움, 코첼라 사막까지
무대 위에서 이들이 축적한 성장의 속도는 가파른 물리적 공간의 확장을 통해 증명됐다. 2022년 9월 서울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약 4000석)에서 첫 월드투어 '매니페스토(MANIFESTO)'의 문을 연 엔하이픈은, 불과 4개월 뒤인 2023년 1월 일본 교세라 돔 오사카에 입성하며 4세대 K-팝 보이그룹 중 최단기간 돔 공연(8만 관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두 번째 월드투어 '페이트(FATE)'를 통해 국내 아이돌 콘서트의 성지로 불리는 케이스포돔(KSPO DOME·옛 체조경기장)을 270도 돌출 무대로 가득 채웠고, 2024년 10월 세 번째 월드투어 '워크 더 라인(WALK THE LINE)'으로 고양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 오르며 국내 첫 스타디움 입성을 이뤄냈다. 이어 2025년 여름에는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과 오사카 얀마 스타디움 나가이에서 총 4회 공연을 펼치며 해외 아티스트 최단기간(4년 7개월) 일본 대형 스타디움 입성이라는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웠다.
작년 4월 미국 최대 규모 음악 축제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 사하라 무대는 이들의 라이브 기량이 만개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핑크문(Pink Moon)이 떠오른 사막의 거친 기후 속에서 엔하이픈은 핸드 마이크와 올 라이브 밴드 사운드에 기대어 45분간 13곡을 쏟아냈다. 정교하게 단련된 신체와 흔들림 없는 가창은 K-팝 아이돌의 에너지를 넘어 록스타의 야성성을 품어냈다.
서울시 홍보대사로서 펼친 '더 시티 서울' 프로젝트는 K-팝 팀의 상상력이 도시의 영토를 어떻게 감각적으로 물들일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최근엔 중남미 스타디움 매진을 기록했다.
◆마술적 공간과 윤리적 실천…'가상의 피'에서 '현실의 연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마술이에요."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속 블랑시의 대사처럼, 엔하이픈은 현실의 평면적 리얼리즘 대신 치밀하게 구축된 마술적 세계관을 택했다. 미니 4집 '다크 블러드(DARK BLOOD)'와 미니 5집 '오렌지 블러드(ORANGE BLOOD)', 정규 2집 '로맨스 : 언톨드(ROMANCE : UNTOLD)'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이들은 하이브 오리지널 웹툰 '다크 문: 달의 제단'과 손잡고 K-팝 신에 '트와일라잇 서사'의 원본을 구축했다.
영원불멸의 형벌 속에서 피를 갈망하지만, 타인을 해치는 대신 자신의 심장을 팬덤 '엔진(ENGENE)'에게 내어주는 젊은 뱀파이어들의 초상은 불안정한 청춘의 결핍과 맞닿았다. 박민수 감독이 연출한 미니 6집 '디자이어 : 언리시(DESIRE : UNLEASH)' 콘셉트 시네마와 여의도 지하 벙커에 세워진 팝업 '메종 엔하이픈'은 이러한 미학적 몰입을 현실의 시공간으로 끌어당겼다. 여기에 뱀파이어라는 가상의 IP('다크문')를 미국 샌디에이고 코믹콘(SDCC 2026)의 담론으로 확장했다.
◆결핍이 빚어낸 밀도…'햄릿'의 고뇌를 넘어 '로미오'의 결단으로
올해 3월 7인 체제로 출발했던 엔하이픈은 맏형 희승의 솔로 독립과 함께 정원, 제이, 제이크, 성훈, 선우, 니키 6인 체제로 팀을 재편하는 중대한 분기점을 맞았다.
한 사람의 부재는 자칫 서사의 균열을 낳을 수도 있었으나, 엔하이픈은 결핍을 서사의 단절이 아닌 밀도의 심화로 치환했다. 파트와 동선의 전면 수정이라는 물리적 성장통 속에서 여섯 멤버는 무대 위 응집력을 극도로 끌어올렸고, 그 절박한 진심은 지난 5월 시작된 네 번째 월드투어 '블러드 사가(BLOOD SAGA)' 무대에서 거대한 에너지로 폭발했다.
과거 세 번째 투어까지 '주어짐과 쟁취함' 사이에서 사느냐 죽느냐를 번민하던 소년들이 '햄릿형 뱀파이어'였다면, 6인의 엔하이픈은 기꺼이 가문의 섭리를 등지고 독약을 삼켰던 '로미오의 능동적 결단'으로 도약했다. 차가운 운명의 속박을 부수고 '너'를 향해 온몸을 던지는 투쟁적 낭만주의가 무대 위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세계관의 밀도(密度), 멤버 간 우정의 점도(粘度)가 높아지고 팬덤 엔진과 연대의 농도(濃度)가 짙어졌다.
미니 8집 '더 신 : 블리스'는 이들이 건너온 모든 방황과 상실의 계곡을 지나 도달한 영혼의 정점이다.
타이틀곡 '블러디 파라다이스(Bloody Paradise)'에서 엔하이픈은 그동안 지켜왔던 차갑고 정제된 다크함의 외피를 찢고 브라질리언 펑크(Brazilian Phonk/Funk)라는 거친 음악적 엔진을 장착했다. 일그러진 기타 톤과 묵직하게 심장을 때리는 킥 드럼, 거친 숨결을 담아낸 퍼포먼스는 턱밑까지 다가온 파멸의 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고 완성해 낸 환희의 카타르시스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줄리아 루이스의 세련된 프로듀싱과 다이나믹 듀오 개코의 감각적인 노랫말, 브라질 싱어송라이터 루이자 손자와의 협업은 관념에 머물 수 있던 뱀파이어의 사랑에 생생한 맥박을 불어넣었다. '투 풀스(Two Fools)'의 질주하는 록 사운드로 시작해 '스턱(Stuck)'과 '배드 포 유(Bad For You)'의 서정성을 지나, 결연한 반격을 선언하는 '체크메이트(Checkmate)'와 상처를 빛나는 순간으로 명명하는 '하이라이트(Highlight)'로 이어지는 트랙의 서사는 한 편의 치밀한 심리극이자 구원의 기록이다.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 심연을 통과해 마침내 낙원을 길어 올린 이들의 음악은 글로벌 리스너들의 마음에 깊은 파동을 일으켰다. 발매 첫 주 209만 장 판매로 팀 통산 다섯 번째 더블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데 이어 '빌보드 200' 1위라는 금자탑을 세운 것은, 상처를 감추는 대신 그 상처 위에서 가장 진실한 춤을 춰 온 소년들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응답이다.
황선업 대중음악 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한대음) 선정위원)는 "최근 기획사들이 팬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해석을 유도하는 프로모션 전략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가운데, 엔하이픈은 일찌감치 일관된 세계관과 장기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팬들이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서사를 구축해왔다. 동시에 음악을 통해 세계관의 중심 정서를 끊임없이 변주하며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해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서사와 음악이 서로를 확장하는 이상적인 공존이야말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글로벌 팬들을 끌어들인 핵심 동력"이라고 짚었다.
피의 운명을 스스로 베어내고 써 내려간 소년들의 연서(戀書)는 이제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영원한 엔진을 켜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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