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석 스티커를 칼로 찢어 훼손하는 사건 발생
2013년 도입된 이후 사회적 합의 이뤄지지 않아
'임산부석 비워둬야 한다' 응답 51%…절반은 반대
해외는 따로 임산부석 없이 노약자석으로만 운영
"지하철 임산부 자리 법으로 확보해달라" 주장도
[서울=뉴시스]이소현 기자 = 지난 6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에서 대림역으로 향하던 열차 안. 임산부 배려석 스티커 문구가 칼에 찢겨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술에 취한 40대 남성은 앉아 있던 승객을 내쫓고, 임산부 배려석에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저출생 문제 해결에 일조하고 임산부를 배려하는 문화를 정착시킨다는 취지에서 도입된 임산부 배려석이 한편으로는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어 우려가 제기된다.
14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관악경찰서는 술에 취해 임산부 배려석을 훼손한 40대 남성을 특수재물손괴 혐의로 입건해 조사 중이다.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갈등이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종종 나오고 있다. 지난 2020년 6월엔 서울 지하철 2호선 외선순환 열차에서 한 70대 남성이 임산부석에 앉으려던 30대 임산부와 갈등을 빚다 어깨를 치는 등 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도입 10년째지만 찬반 논란 여전…절반은 "비울 필요 없다"
관련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두고는 사회적 합의가 명확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2013년 임산부 배려석이 도입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온라인 공간 등에서는 지하철 임산부석을 비워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11월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육안으로 임산부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둬야 한다'고 답한 응답은 51%에 그쳤다.
반면 '비임산부가 앉아 있다가 임산부가 있으면 자리를 양보하면 된다(38%)', '비임산부가 앉을 수 있으며, 각자의 판단에 따라 양보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12%)' 등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 둘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역시 과반에 가까웠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반대 의견이 적지 않다. "지하철에서도 비워두라고 방송하지는 않는다. '양보하세요'라고 하지", "배려석이지 양보석이 아니다", "평소엔 남녀노소 누구든 앉아도 되는 자리", "출퇴근길에는 그냥 앉는다" 등이다.
◆임산부들은 "배려석 만큼 감사한게 없어"
하지만 현실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임산부들은 필요성을 절감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지하철 7호선과 5호선을 타고 출퇴근하는 임신 6개월차 김모씨는 "많은 논란이 있는 자리지만 임산부가 돼보니 배려석 만큼 감사한 자리가 없다"며 "단 비어있을 때만 감사히 앉고 그냥 봐도 임산부가 아닌 사람들이 앉아있으면 그러려니 한다. 근처에 서서 다른 자리가 나길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출산한 윤모(34)씨는 "누군가 배려석 앞에 앉아있어서 임산부 배지를 내놓고 서있을 때면 비켜 달라고 압박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고 털어놨다.
윤씨는 "10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임신과 동시에 약자가 됐다"며 "배려가 의무는 아니지만 부탁하고 싶다. 그냥 앉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혹시 잘못될 까봐 그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신 4개월차 오모(32)씨도 "임신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임신 사실을 알 수 없는 초기, 신체 변화도 없었기 때문에 나조차도 임신한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며 "그런데 지하철을 이용하니 갑자기 어지러웠다"고 전했다. 오씨는 배려석에 앉을 용도로 임산부 뱃지를 뒤늦게 수령했다.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전국 임산부 1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산부 배려 인식 및 실천 수준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44.1%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가장 부정적인 사건으로 '대중교통 배려석 이용 불편'을 꼽았다.
◆해외도 교통약자 배려석 운영…"국내는 임산부석 있어야 겨우 앉는다"
해외에서도 임산부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배려석을 운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임산부 만을 위한 자리를 따로 두기 보다는 교통약자에 포함해 배려하는 형태가 많다.
일본 지하철에는 우리나라 노약자석과 비슷한 개념의 전용석과 우선석이 있고 여기엔 임산부뿐 아니라 노인, 몸이 불편하거나 다친 사람, 아이를 동반한 부모도 앉을 수 있다. 프랑스 파리 지하철의 경우 약자석 상단에 대상의 우선 순위를 표시한 안내문을 부착했다. 임산부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싱가포르 지하철은 열차 내 모든 7인석의 양 끝자리를 지정석(Reserved seat)으로 운영한다. 우리나라와 동일하게 교통약자로 규정되는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객 등이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교통약자석이 노약자들을 중심으로 이용되고 있는 만큼 별도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우리나라 교통약자석에 임산부는 물론, 아동, 일시적으로 몸이 불편하신 분 모두 앉을 수 있게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며 "그 자리를 노약자석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실제 겉으로 표시가 안 나는 초기 임산부들은 교통약자석에 앉았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허 조사관은 "이런 것들이 건의가 돼 임산부석이 만들어지고 임산부라는 걸 표시할 수 있도록 가방에 다는 배지까지 제작된 것이다. 그렇게 해야 겨우 한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나라 대중교통이 너무 붐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하철에서 임산부들이 필요한 배려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늘면서 임산부석을 법으로 지정해달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제력을 부여해달라는 주장이다.
지난 1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하철 임산부 자리를 법으로 확보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다.
늦은 나이에 힘겹게 임신했다고 밝힌 청원인 A씨는 "배려석이고, 호의로 양보가 이뤄지면 좋겠지만 임산부 자리에 비임산부가 앉아있는 경우가 다수"라며 "비켜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비켜줄 생각도 사실 안 한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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