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백년]③'임정 후원자’ 역사 평가…"기록 등 찾아야"
"미주 한인들, 임정에 가장 큰 돈 보내"
일당 5센트…임정 수립 14만달러 보태
쓸쓸한 묘지, 비석엔 반쪽 짜리 이름만
【서울=뉴시스】 김태겸 기자 = 기자가 지난 2월 '3.1운동 및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차 방문한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시이다. 사진은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차만재 박사가 구한말 하와이로 갔다 본토로 가 평생 노동자의 삶을 살다 잠들어 있는 한인들의 묘지를 안내하고 있다. 이들은 노예처럼 일해서 번 일당 5센트 가운데 상당액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아 상해임시정부 재정에 크게 기여했지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제대로된 묘비명도 없이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1903~1905년 사이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신설하고 한인 노동자 약 7200여명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집단 이주 시켰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노동기간을 마치고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그 중 일부는 탄광이나 은광으로 일부는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 다뉴바 과일 농장으로 향한다. 이들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 자금의 60%를 낸 500여명의 민초 독립운동가들이다. 2019.04.10. patk21@newsis.com 【캘리포니아=뉴시스】김태겸 조인우 기자 = 미국의 한인 이주노동자들은 학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돈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을 사실상 이끌었다는 평가다.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미주 지역의 한인들이 임시정부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리들리와 다뉴바 등 중가주 지역 뿐 아니라 하와이오 샌프란시스코, 멕시코, 쿠바 등지에서 애국금 명목으로 구미위원부를 통해 임정에 돈을 보낸 분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미주 국민회 자료집에 따르면 당시 리들리·다뉴바 한인들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특별모금을 진행해 13만8350달러를 상해로 보냈다.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은 특별모금 당시 발급된 영수증을 근거로 다뉴바시의 도움을 받아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리들리와 다뉴바의 노동자들은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없는 살림에 돈을 모아 운영자금의 약 60%를 조달하며 임시정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서울=뉴시스】 김태겸 기자 = 기자가 지난 2월 '3.1운동 및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차 방문한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시이다. 사진은 미 중가주 리들리 공동묘지로 1903년 구한말 갤릭호에 올라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로 온 한인 이주 노동자 중 한사람의 무덤이다. 이들은 노예처럼 일해서 번 일당 5센트 가운데 상당액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아 상해임시정부 재정에 크게 기여했지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제대로된 묘비명도 없이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1903~1905년 사이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신설하고 한인 노동자 약 7200여명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집단 이주 시켰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노동기간을 마치고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그 중 일부는 탄광이나 은광으로 일부는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 다뉴바 과일 농장으로 향한다. 이들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 자금의 60%를 낸 500여명의 민초 독립운동가들이다. 2019.04.10. patk21@newsis.com 일당 5센트의 기적인 셈이다. 금의환향하겠다는 목적을 잃은 이들은 미국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자금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봤다.
중가주 한인들의 지속적인 독립운동 자금 지원 덕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도 다뉴바와 리들리를 자주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창호 선생은 미주 한인들을 독립운동의 기반이라 생각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한 이후 중앙총회와 지방총회를 구성해 해외 한인들을 하나로 묶어 흥사단을 조직하게 된다.
이 전 대통령도 직접 독립운동자금을 받는 한편 중국의 손문에게 아이디어를 얻어 국채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 213명이 묻힌 리들리와 다뉴바 공동묘지에는 적막 뿐이다. 이들의 희생이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서울=뉴시스】 김태겸 기자 = 기자가 지난 2월 12일, '3.1운동 및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 취재차 방문한 미 서부 중가주 다뉴바시이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차만재 회장)가 한국정부와 다뉴바시의 도움을 받아 세운 당시 독립운동 기금을 모아 준 한인 기부자 75명의 명단을 넣은 기념비다. 1903~1905년 사이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신설하고 한인 노동자 약 7200여명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집단 이주 시켰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노동기간을 마치고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그 중 일부는 탄광이나 은광으로 일부는 미 서부 중가주 리들리 다뉴바 과일 농장으로 향한다. 이들이 바로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 자금의 60%를 낸 500여명의 민초 독립운동가들이다. 2019.04.10. patk21@newsis.com 빛 바랜 콘크리트 비석에는 'KIM, LEE, PARK'이라는 반 쪽 짜리 이름 뿐이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이미 낡아버린 조화가 전부,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된 이들의 죽음 이후는 삶만큼 외롭고 쓸쓸하다.
박 교수는 "어려운 상황에도 임정에 돈을 낸 분들이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 그 구체적인 뒷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며 "막연하게 하와이의 파인애플 농장 등지에서 일하다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일반 한인 노동자들은 연구를 하고 알리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다"며 "직접 쓴 글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기록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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