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칼럼]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기사등록 2017/12/31 04:31:42 최종수정 2017/12/31 12:11:33

 【서울=뉴시스】김호경 사회부장 = 고양이가 죽은 날, 아내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으러 동네 중국집에 갔다. 굶지는 말자고 짬뽕을 시켜 억지로 면발을 입 안에 밀어 넣는데, 어느 순간 으윽 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참을 수 없이 줄줄 흘러내려 짬뽕 그릇에 얼굴을 떨군 채 한참 어깨를 들썩였다. 눈물 젖은 짬뽕이라니, 어쩌면 코미디 같은 그 상황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내의 달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주체할 도리가 없었다.

아내가 결혼 전 친동생과 함께 살면서 지난 14년간 키웠다는 고양이 '밀루'를 어느 날 집으로 데려왔다. 처제가 혼자 지내며 돌보던 중 무슨 시험을 보러 미국에 나가느라 연초에 우리 집에 맡기게 된 것이다. 나는 그전까지 반려동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개는 좋아해도 고양이는 이런저런 선입견으로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밀루가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만 홀딱 빠지고 말았다. 처음엔 다소 경계하고 탐색을 하던 이 샴고양이는 곧 기분이 편안해진 듯 수시로 다가와 몸을 비벼댔다. 고양이 치고는 사람의 스킨십, 특히 '궁디팡팡'을 몹시 좋아하는 이른바 개냥이였다. 내가 두 손으로 정성 들여 쓰다듬으면 눈을 지긋이 감고 그르렁 그르렁 골골송을 불렀다. 노묘(老猫)인 탓인지 우다다거리지도 않고 언제나 점잖으며 기품이 있었다.

내가 침대에 누우면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와 이불 위로 폴짝 올라왔다. 내 머리 맡이나 등짝, 발치 쪽에 자리를 잡고 식빵 자세로 몸을 말아 조용히 코를 고는데, 나는 행여 이 녀석이 내 몸에 깔릴까, 단잠을 깨울까 마음대로 뒤척이지도 못하고 잠을 설치곤 했다. 그래도 그 작고 따뜻한 몸을 쓰다듬으며 함께 누워있으면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집에 냥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퇴근길이 더욱 즐거웠다. 심신이 기진맥진해서 일터에서 돌아오는 '형아'에게 밀루는 곁에서 늘 기쁨을 줬다. 밥 달라고, 놀아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야옹거리는 개냥이가 집 안에 늘 평화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알면 더 사랑하게 되나니, 녀석의 캐당당한 습성과 한편으로는 어리광 같은 행동 패턴을 알면 알수록 애착이 깊어졌다.

그런 고양이가 11월 들어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곡기마저 끊었다. 동물병원에 갔더니 췌장과 신장이 안 좋아 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나이가 많아 발생하는 노환이다. 평소 냥이를 키우기에는 집 공간이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싶었건만, 병원의 비좁은 케이지 안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는 밀루를 보니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노쇠한 고양이에게 수술은 엄두를 못 내고 수액만 맞게 하다 나흘 만에 집으로 데려왔다. 좀 기운을 차리는가 싶더니, 오래가지 못했다. 나날이 살이 빠져 피골이 상접한 몸을 웅크린 채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정물처럼 고요히 지내는 노묘를 바라보는 심정은 끝 모를 울적함이었다. 우리 부부 둘 다 수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아내의 심정은 사실 나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밀루가 생후 3개월 때부터 함께 살았던 아내와 처제는 녀석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올해를 못 넘길 것"이라고 포기한 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나에게도 계속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나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 눈시울을 붉히기는커녕 단념을 하지 않았다. "세계 최장수 고양이로 만들겠다"는 흰소리를 해가며 아내를 설득해 다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의사 선생님이 혈액검사를 하느라 앞다리에 주삿바늘을 꽂고 잘 안 나오는 피를 오랫동안 뽑았더니, 냥이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얼마나 아픈지 입을 잔뜩 벌리고 이빨을 드러낸 채 고개를 내저으며 야옹야옹 앓는 소리를 냈다. 가슴이 미어졌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데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인연이 고통임을 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별의 시간을 늦출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련만…. 일주일 넘게 또 입원을 했으나 별 차도가 없고 오히려 악화된 듯해 퇴원을 시켰다. 바로 다음날부터 밀루는 의식이 희미해졌다. 눈은 뜨고 있지만 초점이 없고 겨우 숨만 붙어있는 상태. 어쩌다 일어나도 다리에 힘을 못 주고 비틀거리다 금세 쓰러졌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다는 징후다.

토요일 아내가 잠시 외출한 시간에 밀루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숨이 곧 끊길 듯 말 듯하는 녀석을 지켜보다 둘만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작별 인사가 나왔다. "너를 만나서 형아가 정말 기뻤단다. 너무 늦게 만나서 그게 속상하구나. 항상 나에게 잘해줘서 고마워." 이런 얘기를 혼잣말처럼 건네다가 주책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처음으로 꺼이꺼이 하고 있는데, 녀석이 돌연 고개를 들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잠깐 정신이 돌아와서 집사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은 다음날 한 번 더 있었다. 내 손등에 오른쪽 뺨을 대고 누운 채 정신을 잃고 있던 녀석이 내가 소리 내서 흐느끼자 문득 왼쪽 앞발을 들어 내 팔 위에 살며시 올리는 게 아닌가. 그 지경에도 사람을 위로해주는 것인지 기가 막혔다. 밀루가 아픈 이래 상심은 클망정 아내와 처제 앞에서 짐짓 의연한 척 감정을 겨우겨우 제어하고 있었는데 둑이 한 번 무너지니 걷잡을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울보가 된 나를 두고 몇 시간 뒤 녀석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눈물 젖은 짬뽕을 먹었다.

그 뒤로 한동안 깊은 그리움과 상실감에 빠져 지냈다. 내가 겪게 되리라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소위 '펫 로스(Pet Loss) 증후군'이다. 일이 손에 잘 안 잡히고 사람들을 대면하기도 꺼려졌다. 지인을 만나 술과 담소를 나누며 괴로움을 잠시 잊다가도 허한 마음속을 끈질기게 휘도는 찬바람에 한기를 느끼곤 했다. 맡은 업무와 직책이 있으니 불가피한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연말 약속을 가급적 최소화했다.

사회부 기사를 데스킹 하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이 망치로 개 6마리를 때려죽였다거나 기타 동물 학대에 관한 기사를 접할 때는 고통스러웠다. 이 겨울에 집 주변 길냥이들을 목도할 때도 예전처럼 무심할 수 없었다. 출퇴근길 전철 안에서 사방에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멍하니 서있다 울컥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과거 반려동물을 잃고 탄식하던 사람들을 몰이해 속에 냉소하곤 했던 나 자신을 책망했다.

가까운 친구, 동료, 선후배가 죽었다고 내가 이 정도로 슬퍼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아무리 오래 알고 친한 사이라고 해도 사람 사이엔 대개 애증의 간극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다. 그러나 통신사 사회부장의 빡빡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년 사내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 고양이는 오로지 사랑만을 안겨줬다. 고양이 다운 위엄을 간직하면서도 변함없이 다정하고 살갑게 대해줬다. 늙었지만 하는 짓은 아기 같았다.

내가 귀가하면 방 안에서 졸다가도 헐레벌떡 달려나오고, 책상 앞에서 밤늦게까지 컴퓨터로 볼일을 보고 있으면 다가와서 그만 같이 자자고 솜방망이 앞발로 내 다리를 연신 톡톡 치곤했다. 두툼한 이불 위에서는 꾹꾹이를 신나게 하거나 '이불 동굴'에 쏙 들어가선 숨바꼭질을 하는 듯했다. 수시로 어루만져도 귀찮다는 내색 없이 꼬리를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고 불판의 오징어처럼 배를 드러낸 채 몸을 꼬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물거나 할퀴기는커녕 흔한 하악질 한 번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매일 함께 살면서도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밀루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 뒤 아내가 심란함을 달래려 스노우캣이란 필명으로 유명한 권윤주 작가의 저서를 거의 다 사 왔다. 그중 <to Cats>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양이가 지구 최고의 고양이라고 믿는다." "고양이와 등을 맞대고 누워본 적 있는가? 당신이 이 느낌을 안다면 이미 천국에 다다른 기분이 어떤 건지 알게 된 것이다." 정말 그랬다. 구글 사진과 유튜브 동영상을 아무리 뒤져봐도 밀루 이상 예쁜 샴고양이는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 몸에 바짝 붙어 잠을 청하던 밀루의 따스한 체온과 연약한 촉감 또한 잊을 수 없다.


죽은 지 3주가 지났지만 밀루와 관련된 물건들은 여전히 집에 남아 있다. 뜯어먹기 좋아하던 로즈메리 화분도, 캣닙(Catnip·개박하)이 뿌려져 안고 뒹굴던 인형도, 죽기 직전까지 대소변을 철저히 가리느라 집착하던 모래 화장실도, 올겨울 혼자만의 아늑한 휴식을 취하던 동굴집도…. 피하주사용 수액조차 벽 한쪽에 그대로 걸려 있다. 차마 치울 수가 없다. 그래도 지금은 가슴속에 짙게 드리워졌던 그늘이 많이 걷힌 상태다.

일본의 고양이 전문 병원장이 쓴 <고양이와 함께 나이 드는 법>이라는 책을 보니 펫 로스 증후군에 관해 이런 조언이 나온다. "이별은 힘들지만 머지않아 추억으로 바뀝니다. 먼저 고양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슬픈 기분을 충분히 표현하면 슬픔은 어느새 추억으로 바뀌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찾아옵니다. 후회 없는 치료와 간병을 해낸 주인은 중증 펫 로스 증후군에 빠지는 경우가 적습니다. 고양이의 임종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펫 로스 증후군을 치유하는 길입니다."

이 조언대로 슬픔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밀루가 말년을 비교적 평온하게 보낼 수 있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위안으로 삼았다. 비탄은 컸지만, 무지개 다리에서 밀루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 밀루도 우리를 그리워하며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는 공상을 나누기도 한다. 며칠 전 아내가 꿈 이야기를 해줬다. "밀루가 오빠를 정말 좋아하나 봐. 꿈에서 우리가 평소 때처럼 다 같이 침대에 누워있는데 오빠가 일어나니까 자기도 벌떡 따라 일어나더니 침대에서 얼른 뛰어내리더라고. 몸을 쭉 펴서 기지기를 켜곤 오빠 뒤를 졸졸 쫓아가. '형아 또 어딜 가. 내가 따라가서 또 참견해야지' 하던 그 표정으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끼리는 자연히 이심전심, 동병상련이 생긴다고 믿는다. 이번 경험을 하며 한 가지 든 생각은, 누군가 반려동물의 죽음을 맞았을 때 각 직장에서 다만 하루라도 휴가를 얻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가족의 일원이던 개나 고양이를 일반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담아 그야말로 쓰레기처럼 버리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요즘은 존엄성을 지켜주면서도 간편하고 저렴한 전문업체를 많이 이용한다. 나 역시 일요일 저녁에 밀루가 죽자 한 동물장묘업체에 전화를 했다. 월요일 아침 집 앞까지 차량이 오고, 김포시에서도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 업체로 가서 화장을 한 뒤 유골 단지를 받아 왔다.

정성을 기울인 깔끔하고 진중한 일처리를 감안했을 때 총 20만 원이라는 비용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전에 김포까지 가서 일을 마치고 충무로에 있는 회사로 곧장 이동해 오후 2시 이전 출근했다. 장례식장에서 눈을 뜬 채 누워있던 녀석(고양이는 죽을 때 눈을 감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이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결국 한줌 재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본 그 황망한 심정으로 회사에 도착해 어떻게 업무를 처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표정 관리부터 안 됐을 것이다. 그나마 편집국장 양해를 구해 오후에 출근한 것인데, 전날 저녁에 이 사안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양이가 죽어서 오전에 뒤처리를 좀 하고 출근하겠다"는 말이 좀체 떨어지질 않아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허핑턴 포스트에서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도 휴가를 낼 수 있어야 하는 이유>라는 글을 읽었다. "나는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직장에서 하루 휴가를 내야 할 필요를 이해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개 두 마리는 가족의 일원이다. (중략) 그리고 개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는 날이 오면 나는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애도할 것이다. 몇 시간 동안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쉬지 않고 울 것이다. 사실 반려동물을 잃는 것은 내겐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 언젠가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에서 <반려동물 입양·장례 휴가 주는 기업들> <이탈리아 법원 "반려동물 병간호도 유급휴가 사유"> <반려동물 생일 때 휴가·동반출근…일본 '펫 프렌들리' 기업 확대>와 같은 기사들을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지만 다 남의 나라 얘기다.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지난 28일 발표한 국민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보유하고 있는 가구의 비율은 28.1%(약 593만 가구)나 된다. 이는 2012년의 17.9%, 2015년의 21.8%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이다. 애완인이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가 대략 10년쯤 된 것으로 짐작하는데, 이제 천수를 다한 개와 고양이의 죽음을 맞이해야 할 가정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에 정치권이나 행정부, 기업이 동물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고려한 입법, 정책, 사규를 좀 더 세심하게 고민할 수 있다면 결국 사회적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길이 될 것이라 믿는다.

지금도 밀루를 생각하면 마음이 즐거웠다 아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조울증이 오는 느낌이다. 휴일에 온종일 집에 있을 때면 허전함을 더욱 견딜 수 없어 휴대전화 동영상을 자꾸 꺼내 보곤 한다. 나를 바라보며 웅애웅애 거리는 모습은 매번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아낸다. 나와 비슷한 이들이 허다하리라.

올 한해 아끼던 반려동물을 잃은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슬픔의 수렁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기를. 그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축복 같은 인연과 추억을 기쁘게 되새기며 새해 힘 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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