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고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 전 총재는 광복 직후인 1946년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 등을 역임하며 신탁통치반대 등 우익학생운동을 이끌었다.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고향인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 돼 정계에 입문한 고인은 4·5·8·9·10·12대 국회의원을 지낸 7선 의원이다.
한국정치사에 그가 남긴 족적은 '40대 기수론'이다.
1970년 9월29일, 신민당후보 지명 전당대회에 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이철승 후보가 입후보했다. 이들은 박정희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기성 야권 중진들이 아닌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김영삼 42세, 김대중 45세, 이철승 48세였다.
전대 결과, 1차 투표에선 김영삼 후보가 앞섰으나 2차 결선투표에서는 이철승 후보의 표를 흡수한 김대중 후보가 과반수를 얻어 최종 대선후보에 당선됐다. 김대중 후보는 이듬해 4월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과 99만표 차로 석패했다.
고인은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72년 유신독재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기존 야권 정치인들과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른바 '중도론'이다.
고인은 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른바 중도통합론을 내걸었다.
중도론은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를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극한적인 개헌 투쟁보다 여야가 민생 위주의 정책대결을 벌이자는 이른바 양극단 배제론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김영삼측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하자는 말이냐"며 이철승을 '사쿠라 야당'으로 규정했다.
이에대해 이철승은 훗날 언론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그때 기자들이 김영삼씨파, 누구 장학생 그렇게 나눠져 있었다. 모 신문사 기자가 내가 주창한 중도통합론을 사꾸라라고 썼다. 김영삼씨가 그 기사를 돌려서 나를 사꾸라라고 만들었는데 박정희 유신 시대 때 우리가 정치를 하지 않을 순 없잖아. 백이, 숙제처럼 옥쇄할 수 없고 국회 없이 할 수도 없잖아. 김영삼씨는 국회도 안 나가고 그랬어요. 나는 국회에 참여해서 뒤집자고 했지. 이게 사꾸라론이다. 중도통합론의 핵심은 '야당은 자유만 외치지 말고 여당이 될 생각을 하라. 집권여당은 안보를 내세워 자유를 억압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차근차근 양파 껍질 벗기듯이 많이 했다. 야금야금 그렇게 해서 결국 내가 당수 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1% (포인트)여당한테 이겼다. 그다음에 김영삼, 김대중씨가 정치해금이 된 뒤 합작해서 나를 야당에서 제거할 때 선전선동하면서 사꾸라로 만들었다."
고인은 또 의원내각제 신봉론자이기도 했다.
고인이 신민당 총재 시절이던 1977년 5월 27일 박정희 대통령과 영수회담(당시 언론은 '면담' 정도로 격하해서 표현했다)에서 의원내각제로 개헌할 것을 박 대통령에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이원집정제로의 개헌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지만 참모들의 강력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79년 10.26으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렸다는 것이 고인의 증언이다.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내가 비록 그로부터 많은 정치 탄압을 받았지만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객관적으로 그에 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군인, 남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부단히 공부하며 현상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을 지니고 있는 군인이었다. 비록 독재를 하고 많은 사람을 탄압한 잘못이 있지만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인간미는 특이한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고인은 최근 생전 인터뷰에서도 "나는 처음부터 내각책임제를 신봉해온 사람이오. 내각책임제는 지역편중을 지양하고 축적 있는 정치를 이룩하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보면 대통령제는 오히려 대통령 무책임제로 흐른 경우가 많았어. 이명박 정부는 과거 대통령제인지 내각책임제인지 확실하게 분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샐러리맨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국가와 사회의 실정에 맞는 개헌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좀 늦은 감이 있다고 보네"라고 내각제에 대한 소신을 드러냈다.
고인은 1988년 13대 총선에 낙선한 후에는 정계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색채가 강경 보수색으로 탈변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그는 자유민주총연맹 총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 상임의장 등 우파진영 외곽단체 활동에 몰입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남북정상회담 등 햇볕정책을 원색 비난하며 노무현 정부에서는 '정권 퇴진운동'까지 벌였다.
그는 생전에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도둑맞은 10년"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 탄생 직후에는 "우리가 아스팔트 전(戰)을 펼쳐 권력을 되찾는데 일조했다"고 자평했다.
고인은 강경 보수색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1987년 KAL기 폭파 사건 희생자 유가족들로 구성된 '대한항공 858 가족회'가 지난 2001년 11월 KAL기 사건이 안기부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당국에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자유민주민족회의 의장을 맡고있던 고인은 그러나 "당신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것 아니냐"며 기자회견 진행을 방해했고, 가족회는 손해배상을 요구, 2004년 3월 1심 재판부는 "이 의장이 뚜렷한 근거도 없이 '가족회는 김정일의 프락치'라고 말한 것은 설령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로의 충정에서 비롯된 일이라 해도 위법성을 면할 수 없다"고 위자료 2000만원 지급을 판결했다.
고인은 YS, DJ와 함께 40대 기수론의 선봉에 섰으면서도 자신은 두 사람과 달리 대통령이 되지 못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대권 주자들의 성격이 많이 좌우하지만 나는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망명하는 바람에 5·16 군사정권 하에서 치러진 6,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내가 김영삼, 김대중 씨에 뒤진 이유의 하나다."
호는 소석(素石), 본관은 전의(全義), 발인은 3월 2일이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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