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황순원 대표작 '소나기'의 원제는 '소녀(少女)'?
기사등록 2013/09/23 09:04:00
최종수정 2016/12/28 08:05:24
【서울=뉴시스】황순원 작 ‘소나기’의 원제는 ‘소녀(少女)’다. 김동환 교수(한성대 한국어문학부)의 주장이다. 1953년 11월에 나온 잡지 ‘협동’에 ‘소녀’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황순원은 상당수의 작품 제목을 바꿔 파생본을 형성한 작가”라고 전제한다. ‘술이야기’를 ‘술’, ‘꿀벌’을 ‘집’, ‘간도삽화’를 ‘여인들’, ‘윤삼이’를 ‘왕모래’로 바꾸는 등 예는 많다.
‘협동’의 ‘소녀’가 ‘소나기’의 초본이라는 근거로 김 교수는 제목과 결말에 주목한다. 현 통용본은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로 시작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로 끝난다.
‘초본’은 “아마 어린 것이래두 집안 꼴이 안 될걸 알구 그랬든가 부지요?”/ 끄응! 소년이 자리에서 저도 모를 신음 소리를 지르며 돌아 누웠다./ “쟤가 여적 안 자나?”/ “아니, 벌서 아까 잠들었어요.…얘, 잠고대 말구 자라!”로 마무리된다. 통용본보다 문장이 4개 더 있다.
김 교수는 “이 제목과 결말 부분은 바로 다음 파생본부터 바뀌거나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면서 간접 자료를 내놓는다. “다만 소나기의 그 빼어난 결미에 관해서는 선생께 들은 말씀이 있다. 원래의 원고에서 소년이 신음 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리신 경우다.” (김종회 ‘황순원 선생이 남긴 숨은 이야기들’)
김 교수는 “‘원래의 원고’에는 있던 내용을 ‘발표할 때는 빼었다’는 맥락으로 읽히는데 ‘원래의 원고’가 어떤 텍스트를 의미하는 지는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또한 끝문장이라 해 한 문장만 더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어느 텍스트의 경우를 말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협동’본은 새로운 텍스트로서 탐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박태일 교수(경남대 국어국문학과)의 판단은 다르다. ‘신문학’의 편집후기를 특기한다. “출간이 예정보다 훨씬 지연되는 동안 애써서 얻었던 황순원씨와 김동리씨의 2편 중 김동리씨의 80매 소설은 게재의 우선권을 타지에 빼앗겨 버렸다”는 기록이다.
박 교수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싣기 위해 이미 받아 뒀으나 ‘출간이 예정보다 훨씬 지연’돼 뒤늦게 나왔음을 알려준다. 예정대로라면 ‘신문학’은 1952년 10월에 나올 책이었다. 황순원은 소설집 ‘학’(1956)을 내면서 ‘소나기’를 맨 앞에 싣고 그 끝에 처음으로 ‘1952년 시월’이라는 곁텍스트를 붙였다. 그 뒤 ‘소나기’를 실을 때마다 그것을 되풀이했다. 작품의 창작시기를 정확하게 작품으로 깨우쳐 주는 표지”라는 설명이다. “‘신문학’본 ‘소나기’가 ‘협동’본 ‘소녀’보다 먼저 쓰인 초본이자 원본임에 틀림없다”고 못박는 근거다.
“‘소나기’는 1952년 가을, 초본을 마무리해 광주 ‘신문학’에 넘겼다. 그러나 출판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발간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8월 서울로 되돌아온 황순원은 뒤늦게 서울 ‘협동’의 청탁을 받은 뒤 ‘신문학’에 보냈던 초본 ‘소나기’를 다시 꺼내, 제목을 ‘소녀’로 고치고, 초본에서 모자란다고 여긴 여러 군데를 손질해 개고본을 ‘협동’에 보낸 것”이라고 짚는다. 정리하면 “‘소나기’는 1952년 10월 무렵 창작을 마친 뒤 초본이 광주에서 나온 문예지 ‘신문학’(1953년 5월)에 ‘소나기’로 처음 실렸다. 그 뒤 ‘협동’ 추계호(1953년 11월)에 ‘소녀’로 재발표됐다. 이어서 소설집 ‘학’(1956년 12월)에 ‘소나기’로 실려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소나기마을에서 경희대와 양평군이 주최한 제10회 황순원문학제에서 오간 공방이다. 김 교수는 ‘황순원 초기 문학의 서지(書誌)적 재조명’, 박 교수는 ‘황순원 소설 소나기의 원본 시비와 결정본’을 주제로 발표했다.
‘소나기’가 먼저인가, ‘소녀’가 먼저인가 시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원래 ‘소나기’는 ‘소녀’였다는 견해를 김 교수가 밝힌 이래 6년째 지속되고 있는 멋진 과학 대결이다.
시인 황동규의 아버지, 소설가 황시내의 할아버지인 문호 황순원(1915~2000)의 ‘소나기’는 이 와중에도 여전히 ‘국민단편’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345호(9월30일자)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