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이야기⑭·끝]"기업이 커지면 사회·국가의 것"…사회적 책임 실행

기사등록 2013/06/02 06:00:00 최종수정 2016/12/28 07:32:57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여보, 우리도 이제 잘 살게 되었으니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합시다.”

 “걱정 마세요. 당신이 쌀 한 가마니를 누구에게 주라고 하면 나는 두 가마니를 주는 사람이니까.”

 “아이구, 이래서 내가 우리 몽구 어멈에게는 돈을 못 맡긴다니까.”

 소문난 구두쇠 부부였지만,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 두 사람이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지갑을 열 때가 있었다. 불우한 이웃을 도울 때였다.

 “기업은 규모가 작을 때는 개인의 것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직원 공동의 것이요, 나아가 사회·국가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경우, 옛날 쌀가게를 했을 무렵까지의 것만 내 개인의 재산이었습니다.”

 이것이 정주영 회장의 소신이었다.

 인정이 많았던 아내 변중석 여사 역시 설과 추석 전후로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아원을 방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변중석 여사는 자신이 재벌가 사람임을 드러내지 않았고, 기부금도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한 것을 가지고 갔다.

 현대건설 설립 30주년이 되던 해인 1977년, 정주영은 그동안 가슴에 품어두었던 중대한 발표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우한 이웃을 돕겠습니다.”

 자신이 가진 현대건설 주식의 50퍼센트로 복지 재단을 만든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50퍼센트면 얼마야? 400억 원? 정주영 회장,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하지만 이를 두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았다.

 “에그, 진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건지, 재단이랍시고 만들어서 회사 돈을 빼돌리려는 건지, 아니면 세금 혜택이나 노리는 건지, 그 속을 어찌 알겠소?”

 이런 오해를 받은 이유는 당시 정부가 발표한 ‘기업공개 대상’에 현대가 1순위로 올랐기 때문이다.

 기업공개란 기업의 주식을 일반인들도 거래할 수 있도록 시장에 내놓는 것을 말한다. 주식을 산 사람은 누구나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당시 현대는 미국 경제전문지인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건설은 1958년 전후 복구 사업의 일환이었던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를 시작으로 경인고속도로, 소양강댐, 고리원자력발전소,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거쳐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10억 달러 건설의 수출탑을 쌓았다.

 총매출액이 1350억 원을 육박하니 기업의 재산이 한국 제일이었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기업공개를 촉진했는데, 거의 강압적인 자세로 압력을 가해왔다. 여론도 그렇게 돌아갔다.

 “국민이 함께 키운 회사를 개인의 것으로만 두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회사가 모범을 보여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니오?”

 정직과 신용이 밑천이라고 여긴 정주영 회장은 정치 변화기에 많은 재산을 강제로 빼앗기면서도 탈세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정당한 경영 활동을 해왔다.

 또한 다른 사람이 힘들여 창업한 기업을 손쉽게 얻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여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경영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기업의 이익에서 세금을 내고 남은 30퍼센트 이상을 고용증대와 재투자에 썼다.

 이렇게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도덕한 기업으로 몰릴 판이었다. 억울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공개의 결과에 대해서 정부와 의견이 다르다는
【서울=뉴시스】정주영 회장이 1977년 7월 개인 보유 현대건설 주식 50%를 출연해 아산재단 설립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아산정주영닷컴 캡쳐)  photo@newsis.com
점이었다.

 ‘기업공개만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그의 생각에는 그래봐야 부자들만 주식을 사서 더 부자가 될 것이 뻔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야 옳지 않은가! 즉 정부가 의도한 기업공개의 본래 취지와 그 결과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민 끝에 정주영 회장은 주식 공개는 하되, 현대건설 주식의 50퍼센트로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현대건설을 주식 시장에 공개하면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이 주식을 사서 돈을 벌고, 주식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은 혜택을 보지 못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현대건설 주식의 50퍼센트를 아산사회복지재단에 내놓은 것입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기업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당시에도 일부 기업들이 복지 재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나눔을 실천하지 못 했다. 정주영 회장은 그들과 달리 한국에도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기업가 정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난과 질병을 없애는 데에 앞장설 복지 재단의 롤모델로 미국의 유명한 사회복지재단인 ‘카네기 재단', ‘록펠러 재단’을 삼았다.

 새로 만든 복지 재단의 사업은 크게 의료, 사회 복지, 연구 활동 지원, 장학 사업 4개 부문이었다. 돈이 없어 목숨을 잃는 사람, 돈이 없어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 돈이 없어 가족에게 버림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농어촌 벽지에 병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의료 보험이 극히 일부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그중에서도 농어촌 벽지에 사는 주민들은 심각한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정주영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을 통해 정읍을 시작으로 보성, 인제, 보령, 영덕 등 5곳에 병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100억 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 복지 사업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놀랍고 획기적인 복지 사업입니다. 하지만 왜 다른 종합병원이 도시에 몰려 있겠습니까? 벽지에 병원이 있으면 적자를 면할 수 없는 게 자명합니다.”

 “돈을 벌자고 하는 사업이 아닌 건 알고 있지 않소.”

 “의료진 확보도 어려울 겁니다. 의술은 기술을 넘어선 인술입니다. 기업 운영과는 다릅니다. 숙련공을 양성하듯 단기간에 인재를 키울 수 없어요. 의사 확보는 의료 사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벽지로 오려는 의사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걱정이 많았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문제 해결방법을 고민하고 추진한 결과 드디어 아산병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은 유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것을 본 반대론자들도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아산병원은 벽지 주민들에게 비교적 저렴한 값에 양질의 의료 혜택을 제공했고, 극빈자에게는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물론 예상대로 병원 운영은 막대한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이 병원의 적자 부분을 넉넉하게 지원하도록 했다.

 또 사명감을 가진 의사들이 인술을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서울중앙병원 개원, 금강병원 인수, 홍천병원 개원 등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장학 사업도 남과 다르게 실천했다. 해마다 50억 원을 사회 복지, 연구 활동 및 장학 사업에 지원했다. 대학교수 149명에게 연구비를, 매년 1000명의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했고, 불우한 이웃과 신체 부자유자 등을 위해 봉사하는 사업에 매년 3억원을 지원했다.

 장학금의 경우, 성적 우수자는 물론이고 저소득층 자녀와 근로 학생에게 성적에 관계없이 지급한 것이 특징이었다.

 사실 기업들의 기부나 복지 재단을 통한 사회 공헌 활동이 중요하게 인정받은 때는 1950년대였다.

 1953년 미국의 재봉틀 회사였던 AP스미스 사가 대학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프린스턴 대학에 1500만 달러의 기부금을 냈는데 이 회사의 주주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침해당했다고 무효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뉴저지 고등재판소는 “기업은 좋은 시민성을 가질 의무를 지니고 있으므로 기부 행위가 직접적으로 기업의 이익에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인정한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른 선진국의 기업들도 대체로 이 입장을 수용해서 기업의 복지, 공익 사업을 하나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기게 되었다.

【서울=뉴시스】정주영 회장이 198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정 회장은 1977년 4월부터 1987년 2월까지 10년동안 13대에서 17대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재계 수장으로 활동했다. (사진=아산정주영닷컴 캡쳐)  photo@newsis.com
 그러나 한국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도 그런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기업이 없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가난을 벗어나 잘살아보겠다는 노력이 물질만능주의로 치닫고 있었다.

 특히 이윤을 남기는 것이 목표인 기업가들에게 사회 복지에 대한 책임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업의 바탕이 되는 사회와 국가가 건강해야 기업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라는 정주영 회장의 생각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고, 한국 최초의 대규모 민간 사회 복지 사업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현재 기업들이 벌이는 다양한 사회 복지 활동의 씨앗이 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간 정 회장이 ‘누구나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연보

▲1915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 출생
▲1930 송전소학교 졸업
▲1931 1차 가출, 함경북도 원산 고원 철도 공사판 노동 2차가출, 금화 공사장 노동
▲1932 3차 가출, 경성실천부기학원 수강
▲1933 4차 가출, 인천 부두 하역 노동, 건설 현장 노동
▲1934 복흥상회 쌀 배달점원
▲1938 미곡상 경일상회 개업
▲1939 변중석 여사와 결혼
▲1940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 개업
▲1946 현대자동차공업사 개업
▲1947 현대토건사 개업
▲1950 현대건설 주식회사 설립
▲1953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 수주
▲1957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 수주
▲1965 태국 파티니나라타왓 고속도로 건설공사 수주
▲1967 소양강 다목적댐 공사 수주
▲1968 경부고속도로 공사 착공, 포드 자동차 조리기술 협정 체결, 코티나 자동차 생산
▲1970 현대시멘트사 설립, 경부고속도로 완공,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착공
▲1971 현대그룹 회장 취임
【서울=뉴시스】정주영 회장이 새벽을 가르며 출근하는 모습이다. 왼쪽부터 몽구, 몽준, 몽근, 몽헌. 매일 새벽 3시30분이면 기상해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아산. 청운동 자택에서 아들들과 아침식사를 같이 한 뒤 걸어서 계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진=아산정주영닷컴 캡쳐)  photo@newsis.com
▲1972 26만톤급 유조선 2척 수조, 현대조선소 착공
▲1973 현대조선중공업 주식회사 설립
▲1974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취임
▲1975 현대미포조선 주식회사 설립
▲1976 포니 자동차 생산, 현대상선 설립,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
▲1977 한국 경제인연합회 회장 피선, 아산사회복지재단 설립
▲1981 제24회 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피선,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
▲1982 대한체육회장 피선
▲1983 현대전자 주식회사 설립
▲1984 서산 간석지 사업
▲1985 아시아 최장의 말레이시아 페낭교 완공
▲1988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현대석유화학주식회사 설립
▲1989 한소 경제협력위원회 회장 취임
▲1992 통일국민당 창당, 대표 최고위원 취임, 14대 국회의원 당선, 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1993 탈당 및 국회의원직 사퇴
▲1994 현대그룹 명예회장직 취임, 러시아 고르바초프 수상 면담
▲1995 중국 장쩌민 수상 면담
▲1998 소떼와 함께 군사 분계선 통과 방북,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 금강산 개발사업 개시
▲1999 현대아산 주식회사 설립, 대북사업 전담
▲2000 명예회장직 사퇴
▲2001 러시아 푸틴 대통령 친선 훈장 수상, 3월21일 86세로 타계

 <끝>

 <뉴시스 특별기획 경제거인 시리즈 첫번째 '정주영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주부터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swo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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