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이야기③]눈물의 진수식…전무후무한 조선소·배 동시건조

기사등록 2013/04/27 06:00:00 최종수정 2016/12/28 07:22:19
【서울=뉴시스】우은식 기자 = 창업자 아산 정주영 회장이 1973년 3월 20일 현대조선소(現 현대중공업) 시업식에서 사원들을 격려하는 모습이다. (제공=현대중공업)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1974년 2월, 드디어 배 1척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함께 고생한 직원들에게 고마운 한편 대견스러웠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상황에서, 심지어 도크조차 없이 육상에서 배를 건조해냈다. 세계에서 최초로 시도해 성공한 것이니 정주영 회장의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이 무쇠덩이를 바다에 띄우기만 하면 되는구나.'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회장님, 선장이 항해를 할 수 없답니다."

 "항해를 할 수 없다니, 도대체 왜?"

 "엔진을 시동하기 전에 배를 옮기면 위험하다는대요."

 당시 국내에는 26만톤 급 선박을 운전할 수 있는 선장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선장을 해외에서 어렵게 데려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다는 건가?'

 정 회장 생각에는 선장이 도크의 폭과 방파제 입구가 배의 크기에 비해서 너무 좁아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저, 회장님. 항만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엔 또 뭔가?"

 "엔진 시동 전에 배를 움직이는 것은 항해 규칙에 위반된다고 합니다."

 "나 이거 참!" 설상가상으로 항만청도 배를 띄우지 못하게 했다. 항만청 담당자는 완고해서 여간해서는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잘 들어보시오. 배는 선주에게 인도해야 진정한 배가 됩니다. 그전에는 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만들고 있는 배에는 항해 규칙을 적용할 수 없는게 아닙니까!"

 정주영은 결국 배를 띄워도 된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2월14일 진수식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배를 수영장처럼 움푹 패인 도크안에서 만드는 이유는 배의 선체가 완성되면 도크에 물을 채워 배를 세우고 바닷길을 열어 바다로 내보내기 위해서다.

【서울=뉴시스】1974년 6월 28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열린 26만톤급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의 명명식 장면. 이 초대형유조선은 현대중공업이 건조한 첫 선박으로, 1972년 그리스 선 엔터프라이즈사로부터 수주했다. (제공=현대중공업)  photo@newsis.com  
 배를 바다로 내보내는 과정을 진수식이라고 한다. 이 진수식을 제대로 치러야 배를 제대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현대는 초긴장 상태였다.

 진수식 하루 전날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 있는 정 회장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어왔다.

 "준설 작업을 아직 못 끝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내일 아침에 배가 바다로 나가야하는데, 이제와서 그게 무슨 말이야?"

 진수식을 미뤄야 한다는 말이었다. 진수식에는 선주인 리바노스를 포함해 국내외 유력인사들이 참석하기로 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배 밑바닥이 땅에 닿아 좌초라도 하면 국제적 망신일 뿐 아니라 현대도 끝이었다.

 행사를 미루기에도 이미 늦었다. 정주영은 팔을 걷어붙이고 현장으로 나갔다. 비바람이 심하게 치는 밤이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준설작업을 끝냅시다!"

 포항에서 막 준설 공사를 끝낸 준설선 현대 2호가 울산에 도착해 준설 작업을 돕기로 했다. 밤새도록 비바람과 파도와 싸우며 작업을 하고 나니, 간신히 배가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준설이 됐다.

 2월15일 새벽 1시쯤. 모든 사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이 시작됐다. 어느새 세차게 불던 바람이 그쳤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도크 문이 열렸다.

 물이 가득 차올랐다. 배 2척을 각각의 도크에서 바닷길로 내보내 목표지점에 나란히 정박시켜야 했다. 첫 번째 배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과연 배가 뜰 것인가? 저 무쇠덩이가 뜰 것인가?'

 길이 345미터, 폭 52미터, 높이 27미터. 배라기보다 산처럼 보이는 거대한 물체였다. 정주영은 미래학자 허만칸 박사가 미포만을 보고 피라미드처럼 보인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이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고 있었다. 물이 도크에 가득 찼을 때 누군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배가 떴다!"

【서울=뉴시스】1974년 6월 첫 선박 명명식에서 고 정주영 창업자와 리바노스 선 엔터프라이즈(Sun Enterprise)사의 조지 리바노스(George S. Livanos) 회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제공=현대중공업)  photo@newsis.com  
 떠오른 배를 도크에서 끌어내 안벽(항만이나 운하의 가에 배를 대기 좋게 쌓은 벽)에 붙여야 하는 일도 대공사였다. 예인선을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당시로선 언감생심... 도크 양 측에 네 대의 불도저가 붙었다.

 그런데 네 대의 불도저에 선장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산처럼 큰 배라 관성도 커서 한 번 쏠리면 복구시키기 어려울 게 뻔했다.

 배가 좌우 안벽에 부딪히고 떨이지고 하니 선장도 배를 부리기가 불가능해졌다. 결국 불도저만으로는 견제가 되지 않았다.

 "로프! 로프를 가져와!" 정주영이 어느 틈에 배에 뛰어 올라가 소리를 쳤다.

 회사 임원, 직원, 구경하던 사람들이 다 같이 로프를 잡았다. 로프를 걸어 양쪽에서 잡아당기니 배의 평형이 유지됐다. 진수를 시작한 지 4시간만인 새벽 5시. 프로펠러가 포말을 만들며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선박을 밀어냈다.

 와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눈물도 함께 터져 나왔다. 조선소가 완공되기 전에 선박을 진수하는 것은 세계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배가 도크를 빠져나가 3시간을 항해한 끝에 반대편 전하만에 정박했다.

 마지막 겉치장인 외장 공사를 위해서였다.

 1974년 6월, 울산 미포항. 허허벌판의 모래사장 밖에 보이지 않던 그 자리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려퍼졌다. 대한민국 1호 선박의 건조를 전 세계에 알리는 소리였다.

 선주인 리바노스를 비롯해 박정희 대통령 내외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2척의 배에 대한 명명식이 거행됐다. 선박 건조를 축하하는 의미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진수식 테이프를 끊었다. 26만 톤 급 유조선은 애틀랜틱배론 1, 2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1년 3개월만에 조선소와 선박을 동시에 건조해낸 현대조선소의 놀라운 저력을 높이 산 리바노스는 곧바로 9척의 배를 다시 주문했다.

 한국 조선업계는 2000년대 이후 확고한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계 10대 조선소 가운데 7곳이 한국업체다. 이날의 감격은 이러한 경이로운 기록의 시작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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