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개봉하는 이준익(51)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그러나 ‘아역 백성현’은 없다. 수줍은 미소가 남아있기는 하다. 그래도 그는 늠름한 청년이다.
영화는 1592년 임진왜란 직전 혼돈의 시대를 틈 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반란군 수뇌 이몽학(차승원·40)과 그를 막아내려는 맹인검객 황정학(황정민·40)의 대결을 그렸다. 백성현은 아버지를 죽인 이몽학에게 복수하고자 황정학의 제자가 된 ‘한견자’로 나온다.
조선 최고의 세도가 ‘한신균’의 아들이지만 기생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서자다. ‘개 견(犬)’, ‘아들 자(子)’ 자를 쓰는 ‘개새끼’다. 신분제 사회의 벽에 갇힌 채 성장통을 겪는 서얼 젊은이의 분노와 원망, 한을 날카로운 눈빛과 절규, 반항기 서린 몸짓으로 드러낸다.
백성현은 “관계자들이 ‘넌 잘 될거야’라면서도 ‘근데 나하고는 다음에 하자’더라. ‘너라면 아역 연기는 믿고 맡기겠는데 성인 역은 믿고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3 때부터 2~3년간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게 가장 큰 상처였다. 견자의 울분을 표현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가까운 과거를 떠올렸다.
“어리다는 이유로 배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절망할 때도 있었고 ‘내가 이거밖에 안 되나’ 생각했다”면서 “‘죽고자 하면 산다’고 죽자고 견자를 팠다. 시나리오가 없어도 가상의 견자와 옆에서 대화할 정도였다. 누구보다 분석을 많이 했다”는 독한 마음도 털어놓았다.
“이준익 감독과 차승원, 황정민 두 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견자의 50%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겸양도 빼놓지 않았다. 감독은 그에게 ‘왕을 참하라’와 ‘임꺽정’ 등 책 두 권을 독파하라고 주문했고, 황정민의 조언은 백성현을 용기백배하게 만들었다.
“정민 형한테 견자 역이 부담스러워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형은 ‘네가 캐스팅된 이상 견자는 너 하나뿐이다. 네가 최선을 다했는지는 너만이 안다. 감독이 오케이 했어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하자고 해라. 그 마음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가라’고 했다”며 “형 말을 듣고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촬영했다”는 고백이다.
탤런트 이의정(35)의 어머니도 고맙기만 하다. “어렸을 때 이태원에 살았는데 이웃집에 의정 누나가 살았다. 당시 ‘칠갑산’, ‘소양강 처녀’ 등을 불렀는데 누나 어머니가 끼가 있다고 연예인을 시켜보라고 했다”면서 “부모가 내 연기를 보고 눈물 흘리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며 뿌듯해한다. “조만간 의정 누나 집을 찾아가 감사인사를 드려야겠다.”
차승원과 황정민, 어느 배우처럼 되고 싶을까. “승원 형은 연기할 때 내비게이션처럼 아스팔트 도로 위의 정확한 길을 가고, 정민 형은 어떤 때는 사막을 오르고 또 어떤 때는 도로가 없는 길을 마음대로 질주하는 배우라고 했다. 나한테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다가 갑자기 오프 도로를 달리기도 하지만 다시 도시로 돌아와 질주하는 배우가 되라고 했다”는 이 감독의 조언으로 답을 대신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백성현의 손을 떠났다. “여유가 부족해 감정을 놓친 부분이 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졌으면 관객들이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왜군에 달려들어 5분 정도 더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편집됐다.” 아쉬운 점들이다.
그러나 백성현은 큰 자산을 얻었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신이다. “이번 영화를 통해 내 능력, 위치를 확실하게 안 것 같다”며 “연기를 좋아하고 하고 싶은데 뭐가 맞는지 몰랐다. 너무 많은 방법들이 혼란스러웠는데 채점을 해줄 수 있는 정민 형을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알았다는 게 감사하고 천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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