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테르테 '피봇 투 차이나'…아태 외교 판도 흔들

기사등록 2016/10/21 23:11:23

최종수정 2016/12/28 17:48:57

【베이징=신화/뉴시스】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일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악수하고 있다. 2016.10.20  
【베이징=신화/뉴시스】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일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악수하고 있다. 2016.10.20
【서울=뉴시스】박상주 기자 =  거침없는 막말과 기행, 사법체계를 초월한 마약 소탕작전 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려온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대통령이 이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치외교 판도까지 뒤흔들고 있다. 중국을 방문 중인 두테르테 대통령이 미국과 결별하고 중국 쪽으로 외교 중심축을 옮기겠다는 폭탄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일부 미국 언론들은 두테르테의 이같은 외교정책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에 빗대  '피봇 투 차이나'로 부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20일(현지시간) 두테르테 대통령의 ‘굿바이, 아메리카’ 발언이 냉전체제 해빙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적 힘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는 지각변동을 불러 올 수 있다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미-중간 줄타기 외교가 자칫 아태지역의  불안정을 불러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들도 제기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19일 저녁 중국 베이징에서 수백 명의 필리핀 교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필리핀의) 외교 정책은 중국으로 방향을 확 전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제 미국에 굿바이를 고할 때다. 더 이상 미국의 간섭은 없다. 더 이상 미국과의 군사훈련은 없다”고 말했다.

 ◇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 큰 타격 우려

 당장 당혹스런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미국이다. 로이터통신은 20일 두테르테의 깜짝 선언은 무엇보다도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한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재 필리핀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 핵심적인 방어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필리핀 기지만 해도 5개나 된다. 미국은 이들 5개의 기지를 거점으로 항공모함과 군함, 비행단 등을 운용하고 있다.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은 20일 미국정부는 이번 두테르테 대통령의 “미국과의 결별” 발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커비 대변인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워싱턴과 마닐라 간 긴밀한 동맹에 비추어 당혹스럽고(baffling) 설명하기 어렵다(inexplicably at odds)”라는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다. 변덕스러운 두테르테 대통령과의 불화를 악화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 러셀 동아태 차관보 마닐라 급파

 두테르테 대통령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다니엘 러셀  동아시아 태평양 차관보가 이번 주말 마닐라를 방문한다. 커비 대변인은 “러셀 차관보의 여행은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나 행동으로 인해 다급하게 잡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결별(separation)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 나은 설명을 듣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예측불가능성(unpredictability)이다. 아직까지 미국 정부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양국 간 안보 동맹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요청을 받은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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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AP/뉴시스】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2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앞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사열하고 있다. 2016.10.20
 만일 두테르테 대통령의 말처럼 실제로 필리핀과 미국과의 “결별”이 이루어진다면 양국 간에는 일대 평지풍파가 일수밖에 없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군사원조를 당장 끊을 수 있다. 미국의 수출 비중이 큰 필리핀의 경제 역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미국과의 관계가 단절 될 경우 중국이나 러시아를 통해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두테르테 중국 방문 중 135억 달러 경협 체결

 필리핀 무역장관인 라몬 로페스는 이번 두테르테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135억 달러(약 15조원) 규모의 경제 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가계약 혹은 양해각서 수준에 그치는 것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경제 협력 규모가 어느 정도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 백악관에 따르면 현재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직접 투자는 47억 달러(약 5조3000억원)에 달한다. 미국은 이밖에도 남중국해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필리핀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수 백만 달러의 군사지원을 하기도 했다.

 ◇ 오바마 정부, 필리핀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중행보

 미국정부는 그 동안 이 같은 두테르테 대통형의 반미적 발언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왔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워낙 많은 막말과 기행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이후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3000명 이상의 마약 사범을 살해했다. 대부분 인권을 무시한 초법적인 처형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정부는 변덕스럽고 격정적인 성격의 두테르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는 행보를 해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국 관리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미국 정부 내에서 인권을 무시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사범 단속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둘러싸고 격론이 일었다고 말했다. 결국 필리핀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정부는 절제된 수준의 의사를 표명하는 선으로 정리를 하고 말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과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달 6∼8일 라오스에서 열리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기간 중 첫 정상회담을 갖기로 돼 있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두테르테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마약전쟁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문제를 거론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5일 라오스로 출발하기에 앞서 기자들에게 "오바마는 자신이 뭐라도 되는 걸로 생각하는가? 나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면서 "(오바마가 마약 소탕작전을 언급한다면) '개XX'라고 욕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미국과 필리핀 간 정상회담은 취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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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AP/뉴시스】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19일 중국 베이징 쇼핑몰을 나서고 있다. 2016.10.19
◇ 클린턴 당선 시 필리핀과 인권문제 갈등 악화될 수도

 커트 캠벨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는 만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필리핀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경직될 수 있다고 말했다. 클린턴이 오바마 대통령보다 국제 인권문제에 대해 보다 매파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캠벨 전 차관보는 “필리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많은 의문과 우려를 낳기 시작하고 있다. 인권문제는 무시한 채 지금의 군사적, 전략적 협조 관계만 계속하겠다는 생각은 앞으로 함께 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 FT “두테르테, 미국과 중국간 줄타기 외교 시작”

 외신들은 두테르테의 폭탄 발언에 대해 미국의 우려를 전하면서도 평소 두테르테의 변덕스런 행보로 판단할 때 아직은 그리 심각하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FT는 20일 사설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냉전 이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힘의 재조정(the most significant realignment of geopolitical power in the region) 과정이 진행될 것으로 전망했다. FT는 그러나 두테르테의 발언은 필리핀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밝힌 것이라기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예고한 것으로 풀이했다.  FT는 그러면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줄타기 외교 행보가 필리핀은 물론 주변국들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FT는 중국의 경제지원 때문에 필리핀이 일시적으로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 입장에 기울어지는 것은 단기적인 효과에 혹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FT는 중국은 남중국해 41개 도서를 자신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면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유화적 표현들이 중국을 오랫동안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FT는 필리핀에 대한 중국의 투자 및 무역 약속은 남중국해 도서들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받기 위한 착수금이 될 수 있다면서 필리핀이 이러한 중국의 외교전략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FT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반미행보에는 미국정부의 책임도 있음을 지적했다. FT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 쪽으로 기울어진 배경에는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필리핀은 미국의 당연한 우방으로 간주하면서 우호적 관계를 등한시 해온 잘못도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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