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하다 떠나는 게 꿈”…91세 김윤신의 끝나지 않는 예술[문화人터뷰]

기사등록 2026/11/04 16:08:39 최종수정 2026/11/04 17:26:44

“백 살 넘게는 작업해야 하는데”…멈추지 않는 창작 열정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전기톱 할머니 조각가'로 유명

리만머핀 서울서 개인전 ‘새로운 연속’…12월 24일까지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조각가 김윤신이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새로운 연속'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시는 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린다. 2026.11.04.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백 살 넘게는 해야 되는데, 그때까지 못 갈까 봐 걱정이에요.”

올해 91세. 조각가 김윤신에게는 아직도 작업할 시간이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고 왔어요. 보청기…잘 못 들으시니 왼쪽 귀에 대고 말씀하세요.”

김윤신의 자식 같은 제자이자 김윤신미술관장인 김란이 기자들에게 귀띔했다.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 은빛 머리의 김윤신은 검은 점퍼 안에 파란 맨투맨을 입고, 파란 운동화를 신은 채 기자들을 맞았다.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물든 조각들 사이에 앉은 모습이 작품처럼 선명했다.

귀는 어두워졌지만 작업에 관한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에 “여전하다”고 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김란 김윤신미술관장이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새로운 연속' 기자간담회에서 김윤신 작가를 살피고 있다. 2026.11.04. pak7130@newsis.com


'전기톱 할머니 조각가'로 알려진 그는 아흔을 넘긴 지금도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작업실에서 오후 6시, 때로는 7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가 저녁을 먹은 뒤에도 작은 그림을 그린다.

“그냥 그림이 내 삶이에요.”

그에게 작업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밥을 먹고 숨을 쉬듯 매일 하는 일이다.

얼마나 더 작업하고 싶으냐는 이야기에 그는 오히려 시간이 부족할까 걱정했다.

“내 꿈이라면 작업을 하다가 그 순간에 떠나는 것, 그게 내 꿈이에요.”

그는 자신이 떠난 뒤에도 작품에 담긴 정신이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 정신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가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김윤신의 개인전 '새로운 연속(In the Continuum)'이 5일부터 12월 24일까지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다. 아르헨티나에서 제작한 회화부터 귀국 후 완성한 채색 조각과 신작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탄생한 작품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리만머핀은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현대미술 작가 김윤신의 개인전 '새로운 연속'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40여 년간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해 온 작가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2026.11.04. pak7130@newsis.com


◆“새로워지려 하지 않아도 매 순간 달라져요”
김윤신은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다. 평생 자연과 인간,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며 나무를 깎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조각은 나무를 자르고, 나누고, 다시 결합하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단단한 나무에 톱을 대고 형태를 만들어내는 일은 오랜 세월 반복해 온 작업이다.

그런데 왜 전시 제목은 '새로운 연속'일까.

오랫동안 같은 작업을 이어왔는데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묻자 김윤신은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의지보다 작업하는 순간에 주목했다.
“뭘 새롭게 하고 싶다기보다는 해온 것이 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달라지는 거예요. 꼭 다르게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작업하는 속에서 창의력이 변화하는 거예요.”

그는 시간을 이야기했다. “우리 삶의 근본이 지금 이 순간, 찰나예요. 찰나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거예요.”

1분 전과 1분 후는 같지 않다. 사람은 그 차이를 쉽게 느끼지 못하지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변화가 있다는 설명이다.

“내가 이걸 변화시키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저도 모르게 변화가 오는 것, 그게 창의가 아닐까.”

91세 작가에게 창의성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영감이 아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아도 어제의 손과 오늘의 손은 다르다. 그 차이가 작품을 변화시킨다.

그는 예술과 삶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예술이 삶이다.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어요.”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김윤신 작가가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새로운 연속' 기자간담회에서 백정윤 리만머핀 서울 홍보담당자가 전달하는 기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2026.11.04. pak7130@newsis.com


◆“재료가 다르거든요”…한국 나무가 바꾼 조각
김윤신은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40년 가까이 작업했다. 남미의 광활한 자연은 그의 조각과 회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 돌아온 뒤 작품의 형태가 달라진 것 같다는 질문에 그는 재료부터 이야기했다.

“다른 형태로 한다는 게 자연적인 변화예요. 재료가 다르거든요.”

아르헨티나에서 사용하던 나무는 매우 단단하다고 했다. 톱날이 튕길 정도로 강하지만 일단 잘라내면 절단면이 매끈하게 정리된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 사용하는 나무는 다르다. 톱질한 자리에 날카로운 자국이 남아 추가로 손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방식으로 작업해도 나무가 달라지면 손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손의 움직임이 달라지면 조각의 형태도 달라진다.

김윤신이 말하는 '자연적인 변화'다.

전시장 1층에는 이러한 작업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채색 조각과 최근 회화가 놓였다. 파란색과 초록색, 분홍색과 붉은색이 조각의 여러 면을 가로지른다.

'노래하는 나무 1984-11U1'(2025)은 기존 목조각을 알루미늄으로 주조한 뒤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작품이다. 각 면에 서로 다른 색과 무늬가 펼쳐져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하는 '영혼의 빛 2026-35'(2026)는 기하학적 구조에 씨앗과 꽃, 물결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결합했다. 자연의 생명력과 순환을 탐구해 온 작가의 관심이 새로운 색채와 형태로 이어진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리만머핀은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현대미술 작가 김윤신의 개인전 '새로운 연속' 전경. 이번 전시는 40여 년간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해 온 작가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2026.11.04. pak7130@newsis.com


◆“조각을 전공했다고 조각만 하는 게 아니에요”
김윤신은 조각가로 알려져 있지만 회화와 판화 작업도 꾸준히 해왔다.

왜 조각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지 묻자 그는 미술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회화 작업은 기본이에요. 대학교 들어갈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야 시험에 합격하잖아요.”

그는 특정 장르에 자신을 가둘 이유가 없다고 했다.

“회화를 전공했다고 회화만 하는 게 아니고, 조각을 전공했다고 조각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이어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예술가는 가능하면 뭐든지 다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가 아닐까. 제 생각입니다.”

김윤신은 프랑스 유학 시절 석판화를 공부했다. 조각뿐 아니라 회화와 판화에서도 재료를 더하고 나누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발전시켰다.

캔버스에 물감을 쌓고 긁어내거나 찍어내는 행위를 반복한다. 같은 형태를 찍어내더라도 손에 실리는 힘과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철학은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다.

더하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나무를 깎고 결합하는 조각뿐 아니라 색을 더하고 긁어내는 회화에도 이 원리가 흐른다.

전시장 2층에서는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던 2000년대에 제작한 '환희'와 '원초적 생명력' 연작을 만날 수 있다. 씨앗을 연상시키는 형태와 선명한 색채에는 남미의 광활한 풍경과 자연의 생명력이 담겼다.

오래전 남미에서 그린 그림과 최근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이 한 공간에서 마주한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김윤신의 예술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 선 김윤신 조각가와 임선애 감독. 사진=오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계속 일, 일, 일이잖아요”…자신의 다큐멘터리를 본 소감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김윤신의 삶과 작업을 담은 다큐멘터리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가 상영됐다.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본 소감은 어땠을까.

“계속 끊임없이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이 첫째로 나에게 들어왔어요.”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작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생각을 얘기해 가면서 작업하는 게 나왔으면 참 어땠을까.”

자신의 삶을 담은 영화를 멋있다고 생각했느냐는 질문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잘 살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담담하게 답했다.

“그거는 내 삶이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영화가 작업하는 모습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생각까지 보여줬으면 좋았겠다고 했다.

“좀 더 뭔가 던져주는 게 있었으면 좋은데 계속 일, 일, 일이잖아요.”

평생 나무를 깎아온 작가에게 작업은 단순히 손을 움직이는 노동이 아니다. 그 속에서 생각이 자라고, 시간이 쌓이고, 새로운 형태가 태어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은 결국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스틸 컷. 모은 발 프로덕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마지막 고국 방문이 새로운 출발로…91세의 '새로운 연속'
김윤신은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1959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64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공부했다.

귀국 후 대학에서 조각을 가르치며 활동하던 그는 1984년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남미의 자연에 매료돼 수십 년간 나무를 깎고 그림을 그렸다.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신의 이름을 건 김윤신미술관도 세웠다.

그의 인생은 아흔을 앞두고 다시 방향을 틀었다.

2022년 한국을 찾았을 때만 해도 생애 마지막 고국 방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듬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가 전환점이 됐다.

이 전시를 계기로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과 리만머핀 공동 창립자 라쉘 리만을 만났다. 2024년, 89세에 두 갤러리와 공동 전속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에는 세계 최대 현대미술 축제인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참가했다. 전기톱으로 썰고 깎아 만든 나무 조각과 대리석 조각을 선보였다.

당시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본전시관에서 만난 김윤신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순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평생 작업에만 몰두해 온 그에게 베니스비엔날레는 예상하지 못했던 무대였다.

“그동안 작업만 하면서 비엔날레 전시는 생각도 못했는데…이렇게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주고…이제부터가 아니겠어요?”

그때의 말은 현실이 됐다.

2025년 리만머핀 뉴욕과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올해는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했다.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의 정원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작품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하버드미술관에도 소장됐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고국 방문이 새로운 출발이 된 셈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김윤신 작가가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새로운 연속'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는 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린다. 2026.11.04. pak7130@newsis.com


그러나 그가 이날 가장 오래 이야기한 것은 전시 경력이나 성과가 아니었다.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 손에 닿는 나무의 감촉, 같은 일을 반복해도 조금씩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2년 전 베니스에서 “이제부터가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던 작가는 이제 백 살 이후의 작업을 걱정한다.

“백 살 넘게는 해야 되는데….”

아흔한 살 김윤신에게 예술은 완성해야 할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 내일도 계속할 일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손으로, 오늘과 다른 내일의 작품을 만드는 일. 그가 말하는 '새로운 연속'이다.

그의 조각은 오늘도 파랗고, 붉고, 초록빛으로 선명하다. 아흔한 살 김윤신의 예술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리만머핀은 4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현대미술 작가 김윤신의 개인전 '새로운 연속' 기자간담회를 갖고 신작을 비롯한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40여 년간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해 온 작가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2026.11.04. pak7130@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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