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마틴 맥도나가 서부극을 만들면 '와일드 호스 나인'

기사등록 2026/11/04 00:00:00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 리뷰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11월4일 공개)은 마틴 맥도나식(式) 서부극이다. 한때 세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무자비하게 주물렀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회한만 남은 총잡이가 주인공인 그런 웨스턴 말이다. 물론 겉모양만 보면 이 작품은 웨스턴 같지 않다. 무대는 서부가 아니고, 카우보이도 없다. 야생마가 있을 뿐이다. 극 중 크리스(존 말코비치)는 말한다. "말만 나오는 서부극을 보고 싶어." 그러자 리(샘 록웰)는 이죽거리며 답한다. "그런 서부극을 누가 보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서부극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맥도나 감독이고, 맥도나 감독이라면 이런 서부극을 보게 할 수 있다.

아옌데 정권이 들어선 뒤 정치 격랑이 휘몰아치던 1973년 칠레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CIA 요원 크리스와 리가 새 미션을 받아 칠레 본토에서 약 3500㎞ 떨어진 이스터섬에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와일드 호스 나인'은 맥도나 감독이 전작 '킬러들의 도시'(2008) '이니셰린의 밴시'(2023)에서 보여준 특유의 버디무비에 서부와 첩보를 이식한 결과물이다. 맥도나 영화의 정수인 부조리한 캐릭터와 날 선 코미디, 유려한 대사는 여전하고, 여기에 역사·정치적 코멘트를 러닝타임 116분간 때로는 직격하고, 때론 에둘러가며, 어떤 때는 감상적으로 눌러 담는다. 단순한 텍스트에 풍성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콘텍스트. 최고의 각본가라는 맥도나 감독을 향한 상찬을 재확인해준다.

'와일드 호스 나인'은 맥도나 감독 영화 중 가장 정치적이다. 극작가로 활동하던 때 대놓고 '이니시모어의 중위' 같은 정치적인 작품들을 만들다가 영화로 넘어오면서 개인에 집중하는 듯했던 그는 '쓰리 빌보드'(2017)부터 다시 정치를 한 축으로 삼기 시작하더니 이번 작품에선 미국이 중심이 된 현시대 제국주의를 대놓고 조롱한다. 전 세계를 돌며 미국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요인(要人) 68명을 암살해 CIA 전설로 불리는 크리스는 바로 그 제국주의의 상징. 맥도나 감독은 13년 전 이스터섬에 처음 갔다가 그 강렬한 풍광에 반했고, 여기에 어린 시절 들은 영국 밴드 더클래시의 '워싱턴 불릿'(Washington Bullets)이 얹어지며 이 작품이 탄생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와일드 호스 나인'을 정치 메시지가 돌출된 영화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함의와 의도를 드러낼 때와 감출 때를 정확히 구분해 이야기 흐름에 훼방을 놓지 않는 게 맥도나 감독의 장기. 이 영화는 세계를 향한 근심 못지않게 이스터섬에서 펼쳐질 비밀 임무의 서스펜스와 크리스라는 인간의 우울과 파트너 크리스·리의 관계와 이스터섬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감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이 모든 걸 빈틈없이 교직해 하나의 스토리로 엮는다. 앞서 만든 '쓰리 빌보드' '이니셰린의 밴시'만큼 빼어나다고 할 순 없지만, 두 영화가 모두 걸작이란 평가를 받아서 그럴 뿐 '와일드 호스 나인' 만듦새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처럼 '와일드 호스 나인'은 어떤 소재라도 꺼내어 얘기해볼 수 있는 작품인데, 결국 크리스라는 인물을 탐구하는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는 폭력의 담당자 프랭크(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이자 과거를 후회하는 빌 머니(용서 받지 못한 자)이고 결국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다시 황야로 향하는 이선 에드워즈(수색자)다. 맥도나 감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어쩌면 크리스가 카우보이조차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만 같다. 온갖 종류의 카우보이를 태우고 이끄는대로 황야를 질주하던 말. 카우보이는 늙고 병든 말을 갈아타려 하고, 말은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 떠나려고 한다. "난 야생마가 되고 싶어."

이 작품 배경인 이스터섬과 극 중 언급되는 또 다른 장소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미국 서남부 모뉴먼트 밸리는 크리스라는 캐릭터와 그가 상징하는 세계에 관한 주석이다. 크리스가 이스터섬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고 한 건 CIA로서 삶을 모아이와 같은 영원한 기념비로 남기고 싶단 바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정말 죽고 싶은 장소는 베네치아라고 고백한다. 그곳은 한 인간으로서 꿈꾸는 천국과도 같은 장소. 그런데 결국 크리스는 유골을 모뉴먼트 밸리에 뿌려달라고 한다.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이스터섬도 베네치아도 아닌 서부극을 상징하는 장소인 모뉴먼트 밸리 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리를 연기한 배우 샘 록웰은 어느 작품에 들어가나 그 존재감을 숨기지 못하는 배우이고 '와일드 호스 나인'에서도 더 좋을 수 없는 연기를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크리스를 연기한 존 말코비치의 영화다. 도무지 좋아하기 어려운 데다가 극 구조상 다소 극화돼 있는 인물에 말코비치는 인간의 실감을 불어넣는다. 그의 지친 눈과 옅고 건조한 미소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통탄이 있다. 아마도 그건 일흔을 넘긴 배우에게만 있을 수 있는 얼굴일 게다. 말코비치는 이 연기로 베네치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아마도 내년 초 열릴 미국아카데미시상식 남우주연상 역시 그가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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