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또 다른 동음이의어
세종문화회관 '2026 김동률 콘서트 - 오래된 노래' 리뷰
2025년 케이스포돔서 연 '산책'과 세트 공연
오케스트라 빠진 대신 음악 원형 그대로 드러내
편곡된 전람회 '첫사랑' 부르며 故서동욱 추모
"부화뇌동 경계…'주제 파악' 잘하고 초심 잃지 않겠다"
"우리 조금만 더 늙어서 곧 만나요"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KSPO DOME)을 함성으로 채웠던 '2025 김동률 콘서트 - 산책'이 풀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밀물'의 장관이었다면, 지난 17~19일과 22~25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진 '2026 김동률 콘서트 - 오래된 노래'는 웅장한 외피를 거두어낸 '썰물'의 시간이었다.
김동률 콘서트 역사상 처음으로 그의 인장과도 같은 오케스트라 없이 치러진 이번 무대는 결핍이 아닌 정화의 기록이었다. 오케스트라가 물러간 빈자리에는 보컬의 숨결, 밴드의 유기적인 호흡, 개별 악기들의 명징한 음색, 그리고 관객들이 각자의 세월 속에서 길어 올린 기억의 물성이 차올랐다.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는 단순한 콘서트가 아니다. 우리 삶의 또 다른 동음이의어다.
어떤 노래도 몇 줄의 줄거리로 환원될 수 없듯, 삶 역시 건너뛸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고유한 '음색'으로 빚어내는 과정이라 그렇다. 우리는 저마다 마주한 불협화음마저 서사의 일부로 품어 안으며, 단 한 번뿐인 자기만의 형식을 끝까지 연주해 나간다는 점에서 저마다의 노래를 살아내고 있다.
김동률이 2008년 발표한 '오래된 노래'라는 타이틀은 어느덧 객석의 관객 각자의 '오래된 노래'들, 즉 '오래된 삶'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시간의 무게를 품격 있게 증명해냈다.
◆밀물과 썰물의 조화…2년의 시간으로 빚은 세트 공연
2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김동률은 이번 공연을 두고 "2년 전부터 작년 '산책' 공연과 함께 세트로 준비했던 기획"이라고 털어놨다. 거대한 경기장에서 50명이 넘는 대편성 연주자와 함께 감정의 최대치를 밀어 올렸던 '산책'이 있었기에, 7년 만에 아레나가 아닌 극장으로 돌아와 밴드와 소편성의 현악,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감정의 밑바닥을 응시하는 '오래된 노래'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3, 4년 기점으로 공연해 올림픽 혹은 월드컵 뮤지션으로 통한 김동률이 1년 만에 공연하는 건 이례적이다.
특히 오케스트라라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려놓은 이유에 대해 그는 "타협이 아닌 음악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 빨리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칫 게으름이나 축소로 오해받기 전에, 창작자로서 가장 단단한 상태일 때 자신의 알맹이로만 승부하고 싶었다는 고백이다.
그 선언처럼 1부의 문을 연 첫 곡 '겨울잠'은 김동률의 목소리와 건반 단 한 대로 시작됐다. 과장된 도입부 없이 침묵 속에서 퍼져나간 저음은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낸 음악의 원형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날로그의 질감과 '율밴' 멀티플레이어들의 숨결
이번 공연의 또 다른 미학적 성취는 손쉬운 가상화폐 같은 디지털 영상을 거부하고 선택한 '아날로그의 물성'에 있다. '여름의 끝자락' 무대 위에 펼쳐진 것은 LED 스크린의 그래픽이 아닌, 무대 위에 실제로 심어낸 푸른빛 밀밭이었다.
김동률은 "좋은 무대 연출이란 음악의 특성과 색깔과 결을 같이 하는 연출"이라며 "어쿠스틱 음악에는 모내기하듯 한 땀 한 땀 심은 아날로그 무대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의 소속사 이름도 뮤직팜 엔터테인먼트다. 눈앞에 실재하는 밀밭의 흔들림을 배경으로 정동환의 유려한 클래시컬 피아노와 이어진 '문라이트(Moonlight)' 속 김부민의 끈적이고 섹시한 테너 색소폰 솔로가 흐를 때, 객석은 잊고 지내던 어느 계절의 물리적 온도를 고스란히 체감했다.
오케스트라의 빈자리는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전담 밴드 '율밴'과 최정예 세션진의 헌신으로 촘촘히 메워졌다. 드러머 박은찬, 베이시스트 최인성, 기타리스트 김동민과 이태욱, 건반 연주자 박민우, 멜로망스 멤버이기도 한 피아니스트 정동환, 퍼커셔니스트 김진환이 구축한 밴드 사운드는 군더더기 없는 탄탄한 뼈대를 이뤘다.
퍼커션 김진환의 아이디어로 박은찬·김동민·정동환·박민우 등이 무대 전면에 나란히 나와 작은 손악기와 큰북(수르두)을 합주한 '뒷모습',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의 애수 어린 연주를 축으로 20세기 초 모던 보이 시절의 질감을 살려낸 탱고 풍의 '낙엽'은 편곡의 백미였다.
무대 곳곳에서 분투한 멀티플레이어들의 땀방울도 빛났다. 트럼페터 조정현은 김동률의 부탁으로 2년간 연마한 전주 휘슬을 직접 불어 '출발'의 설렘을 길어 올렸고, 트롬보니스트 추명호와 색소포니스트 김부민이 가세한 관악 섹션은 풍성한 공간감을 직조했다. 특히 김부민은 소프라노·알토·테너 색소폰에 클라리넷, 전자 윈드 악기(EWI)까지 홀로 5개의 악기를 이고 지며 무대를 종횡무진했다. 콘트라베이시스트 김유성은 본령인 현악기뿐 아니라 무대 구석에서 건반 연주까지 도맡으며 든든한 저음을 받쳤다.
1부 내내 숨죽였던 노영채·강태우·정결·임주현·김미영·권은진 등 6인의 코러스는 2부 첫 곡 '바이크 라이딩(Bike Riding)'에서 극적으로 전면에 등장해 화려하고 꽉 찬 화성으로 오케스트라 이상의 밀도를 채워 넣었다.
◆'첫사랑'의 경쾌한 변주…슬픔을 박제하지 않는 성숙한 애도
이번 무대에서 가장 뭉클하면서도 빼어난 순간은 2부 중반에 울려 퍼진 전람회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은 2024년 12월 세상을 떠난 전람회의 벗인 베이시스트 고(故) 서동욱과의 인연이 시작된 곡이다. 작년 '산책' 콘서트 앙코르에서 김동률은 서동욱의 사진을 띄운 채 눈물로 이 곡을 부르며 팬들과 함께 애통한 이별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오래된 노래'에서 다시 불린 '첫사랑'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1990년대 TV 미니시리즈 주제가를 연상케 하는 경쾌하고 복고적인 밴드 사운드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최인성의 리드미컬한 베이스 기타 라인이 곡을 이끌자 객석에서는 눈물 대신 자연스러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동률은 멘트를 통해 "'첫사랑'을 그렇게 너무 슬픈 노래로만 박제해버리면 영원히 다시 부를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신나게 바꿔서 박수 치며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며 "아마 그 친구(서동욱)도 이 버전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요. 베이스 기타 소리가 나오니까"라고 담담히 웃어 보였다.
슬픔을 영구한 상흔으로 남겨두지 않고, 경쾌한 리듬을 입혀 오늘을 살아가는 생의 동력으로 되살려내는 것. 친구가 사랑했던 악기의 소리를 복원해 무대 위에서 함께 달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남겨진 자가 부재하는 존재를 지키고 동행하는 가장 품격 있고 윤리적인 애도의 방식이었다.
◆부화뇌동(附和雷同) 않는 보폭…자신을 아는 자의 '주제 파악'
그는 "나 역시 (스타 피아니스트들인) 조성진이나 임윤찬 공연 티케팅에 실패해 본 적이 있어 관객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왜 더 큰 경기장에서 길게 하지 않고 굳이 극장으로 돌아왔느냐'는 세간의 아우성에 대해 진중한 생각을 풀어놓았다.
"세상과 유행의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잡기 버거울 때도 있지만, 남의 말에 휩쓸려 줏대 없이 흔들리는 부화뇌동(附和雷同)을 경계합니다.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늘 '주제 파악'을 잘하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제 음악의 정의와 역할을 지키며, 저만의 속도로 묵직하게 걸어가겠습니다."
자신의 깜냥과 음악의 영토를 정확히 인식하는 태도, 즉 '주제 파악'이란 단어의 본래적 엄정함을 회복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공연은 앙코르곡 '그 노래'를 지나, 관객 모두의 어깨를 감싸 안는 '동행'으로 닫혔다. 첫 곡 '겨울잠'에서 고독하게 얼어붙어 있던 한 인간의 내면은, 19곡의 여정을 거쳐 객석이라는 복수(複數)의 온도로 확장됐다.
"우리 조금만 더 늙어서 곧 만나요."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는 시간의 흐름을 긍정하는 자만이 건넬 수 있는 다정한 언약이었다. 밀물이 지나간 썰물의 백사장에 깊게 패어 있던 관객들의 고단한 삶 위로, 김동률이라는 단단하고 오래된 노래가 조용히 포개졌다. 우리 삶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오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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