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그 글씨 앞에서 한 아들이 울었다.
애국지사 박원근의 아들 박용현 씨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인 1950년 보은경찰에 학살당했다.
아들에게 남은 것은 희미한 기억뿐이었다. 아버지의 유품 하나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버지의 친필이 전시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글씨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아버지의 흔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글씨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의 글씨였다.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 한 그릇의 밥도 나라의 은혜라는 뜻이다.
애국지사의 이름으로 친일파의 글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글씨의 소장자는 다름 아닌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다.
유 관장은 2019년 온라인 경매에서 5만원에 구입한 글씨를 박원근의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경매를 진행한 아이옥션의 공균파 대표는 "시작가가 1만원인 '땡처리 경매'였다"고 설명했다. 경매 당시 작품은 박덕원의 글씨로 출품됐다.
문제가 된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은 2년 전부터 준비됐다. 지난 2월 3일 확정된 최초 출품작 목록에는 이 글씨가 없었다.
그런데 5월 8일 유 관장이 자신의 소장품을 추천했다. 약 2주 만에 전시 위치까지 확정됐다. 경매에서는 '박덕원의 글씨'였던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애국지사 박원근의 글씨가 된 것이다.
박물관이 작품의 작가를 독립적으로 비교·검증하는 절차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유 관장은 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별도 감정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 자신이 서예사 전공자라서 확신했다."
전문가의 확신은 검증의 출발점이지, 검증의 종착점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로 이어졌다. 개인의 판단에 국가기관의 공신력이 더해진 것이다.
진실은 박물관 밖에서 찾아왔다.
외부에서 글씨의 진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박물관은 작품을 철수하고 전문가 7명의 검증을 거쳐 박중양의 글씨라는 결론을 내렸다.
박물관이 전시 전에 걸러내지 못한 오류를 외부의 제보자가 밝혀낸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박물관은 전시 철수와 검증 결과 발표 과정에서 사과했다. 그러나 해당 글씨가 관장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유 관장은 국정감사에서 자신의 소장품임을 처음 밝히지 않은 것은 개인 자랑이 될까 봐서였고, 오류가 드러난 뒤에는 미술사가로서 부끄러웠다고 설명했다.
"제가 미술사가로서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그게 저의 큰 실책이었습니다."
국민과 애국지사 유족, 박물관 직원들에게 거듭 머리를 숙였다.
그는 작품을 전시에 내놓은 데 사적인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기증할 예정이었던 작품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출품했다는 것이다.
기증은 선의일 수 있다. 그러나 선의가 진위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순수한 동기가 부실한 검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더욱이 공공기관의 전시 이력은 작품에 새로운 공신력을 부여한다. 관장 개인의 소장품을 그가 이끄는 박물관에 전시하는 과정에서 이해충돌 가능성을 제대로 검토했는지도 따져야 한다.
국감에서는 사퇴 요구까지 나왔다.
김석기 국민의힘 의원은 박물관이 외부의 지적을 받고서야 작품을 철거한 일을 질타했다. 유 관장이 문화재청장 시절 숭례문 화재 이후 사직서를 제출했던 일까지 거론하며 거취 결단을 촉구했다.
유 관장은 거듭 사과했지만 사퇴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박물관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했다.
사과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다. 책임은 그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에 답하는 일이다.
자신의 명예가 걸린 순간, 사람은 진실 앞에서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영화 '언피니시드'(The Debt)가 떠오른다.
1960년대 나치 전범을 생포하려던 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 세 명은 작전에 실패한다. 그러나 전범을 사살했다고 보고한다. 실패는 영웅담이 되고, 거짓말은 국가적 자부심이 된다.
여주인공 레이철의 얼굴에는 전범과 맞서다 생긴 상처가 남는다. 세상은 영웅의 상처로 기억하지만, 그에게는 감춰진 진실의 흔적이다.
세월이 흐르고 딸이 어머니의 영웅담을 책으로 펴내자 진실을 밝히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지켜야 할 명예와 가족,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요원들은 처음부터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유 관장이 처음부터 글씨의 주인을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처음의 오판은 실수일 수 있다. 그러나 오류가 드러난 뒤에도 자신의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다른 문제다.
진실을 몰랐을 때의 오류와 진실을 알게 된 뒤의 침묵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국감에서는 작품의 진위뿐 아니라 관장 개인의 소장품과 가족의 기증을 둘러싼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관장 개인의 소장품을 전시해 작품의 가치를 높이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유 관장은 기증할 예정이었던 작품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유 관장의 부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돌호랑이'도 논란에 올랐다. 기증 절차와 박물관 규정 위반 여부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유 관장은 박물관 측의 요청으로 기증한 것이라며 "기증한 것도 죄인가"라고 반문했다.
기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기증이라는 선의가 국립박물관의 수증 기준과 전시 절차를 대신할 수는 없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디에 전시할 것인지는 기증자의 명성과 무관하게 판단해야 한다. 기증은 선의일 수 있다. 검증은 의무다.
이번 일이 더 안타까운 것은 유홍준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 때문이다.
유홍준은 평생 미술사를 연구하고 문화유산의 가치를 대중에게 알려온 학자다. 그의 책을 읽으며 우리 문화유산에 눈뜬 사람도 많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이 남긴 상처는 더욱 깊다. 평생 쌓은 명예를 지키려다, 평생 지켜온 가치까지 잃을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 사람의 권위로 운영되는 기관이 아니다.
관장이 추천한 작품이라도 독립적인 검증을 거쳐야 한다. 전문가의 명성은 검증을 생략할 이유가 아니라 더욱 엄격하게 검증해야 할 책임의 무게다.
이번 사건에서 진실을 바로잡은 사람은 유명한 학예사도, 미술사학자도, 국립박물관장도 아니었다.
박물관 밖에서 "틀렸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유 관장도 국정감사에서 박중양의 글씨일 가능성을 제기한 제보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해당 작품이 애국지사 박원근의 작품으로 통했을 것."
그 한 사람의 문제 제기가 국가기관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영화 '언피니시드'의 원제는 'The Debt'. 빚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끝내 마주해야 했던 것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진실의 빚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다.
그 글씨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애국지사의 아들에게, 박물관을 믿었던 국민에게 진 빚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사과가 아니다. 관장의 판단조차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관람객 650만 명을 돌파했다. 많은 사람이 찾는 박물관일수록 전시의 정확성과 신뢰에 대한 책임도 무거워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개인의 명예를 지키는 곳이 아니다. 역사의 진실을 지키는 곳이다.
역사를 바로잡은 것은 권위가 아니라 의심이었다.
국민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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