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군대 갈까 두려웠다"…러시아인 해외이주 문의 8배 육박

기사등록 2026/09/16 10:19:18 최종수정 2026/09/16 11:06:25

아버지 이어 남편 입대 걱정…23세 여성도 고국 떠나

귀국했던 청년, 인터넷 통제에 일 막혀 다시 해외로

[상트페테르부르크=AP/뉴시스] 23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군 징집병들이 할당 군부대로 향하기 전 열린 송별식에 참석해 이동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봄 징집 기간 18~27세 사이 14만7000명을 징집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징집병들은 1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2023.05.24.
[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러시아에서 하원 총선 이후 추가 동원이 이뤄질 수 있다는 불안이 커지면서 해외 이주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

14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의 해외 이주를 돕는 단체 코브체크는 8월 접수한 문의가 5월의 거의 8배로 늘었다고 밝혔다. 코브체크는 러시아어로 '방주'라는 뜻이다.

지난달 러시아를 떠난 모스크바 출신의 23세 여성은 추가 동원설과 남편의 입대 가능성을 출국 이유로 꼽았다. 남편은 올해 석사학위를 받으면 병역 연기가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안전을 이유로 익명을 요청한 이 여성의 아버지도 2022년 해외로 떠나 징집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는 "남편이 군대에 가게 될까 정말 두려웠다"며 지금 군에 가는 것은 "편도 티켓"이라고 말했다.

다만 문의 증가가 같은 규모의 출국 증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AP는 현재의 이주 규모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첫해인 2022년 수십만명이 떠났을 때에는 크게 못 미친다고 전했다. 당시와 달리 국경에 긴 줄이 늘어서거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국가행 항공권이 동나는 상황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AP/뉴시스] 23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군 징집병들이 할당 군부대로 향하기 전 열린 송별식에 참석해 도열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봄 징집 기간 18~27세 사이 14만7000명을 징집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징집병들은 1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2023.05.24.
아나스타시야 부라코바 코브체크 설립자는 "지금 국경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사람들이 이주를 준비하고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추가 동원설은 오는 20일 투표가 끝나는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선거와 맞물려 퍼지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은 러시아가 총선 이후 추가 동원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 대통령실인 크렘린궁은 이를 거듭 부인했다.

러시아에서는 2022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30만명 규모의 부분 동원을 발표한 뒤 군에 불려갈 것을 우려한 남성들이 대거 출국했다. 이번에 AP와 인터뷰한 이들 가운데는 당시의 경험 때문에 다시 떠나기로 한 사람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으로 이주한 이반 나자로프도 군 복무에 대한 불안을 전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투입돼서는 안 되는 의무복무 병사들이 전장 파견을 위한 복무 계약에 서명하도록 강요받는다는 보도를 접했다며 "내게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AP/뉴시스] 23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군 징집병 송별식이 열려  한 징집병이 할당 부대로 떠나기 전 송별 나온 애인과 입맞춤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봄 징집 기간 18~27세 사이 14만7000명을 징집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징집병들은 1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2023.05.24.
인터넷 통제도 이주를 결심하게 한 이유였다. 올여름 조지아로 떠난 28세 디지털 콘텐츠 마케팅 종사자는 이번이 두 번째 해외 이주라고 AP에 말했다. 그는 2022년 부분 동원을 피해 출국했다가 지난해 고향인 울리야놉스크로 돌아왔다.

이 남성은 해외 고객을 상대로 원격으로 일했지만, 러시아 당국이 수많은 인터넷 플랫폼과 사이트·서비스를 차단하면서 업무가 어려워졌다고 했다. 접속 제한을 우회할 수 있는 가상사설망(VPN) 서버를 찾기 위해 계속 서버를 바꿔야 했다.

추가 동원설도 다시 떠나기로 한 이유였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정착한 그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평화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러시아에 남겨둔 채 언제 돌아갈지 기약하지 못하고 있다.

AP는 올여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드론 공격이 연료난을 일으키고 전자상거래 업계에도 타격을 줬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부터 드론 공격을 이유로 인터넷 접속을 강하게 제한해 왔다.

[블라디보스토크=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일(현지 시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EF) 본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6.09.04.
정치·사회적 자유가 줄어드는 데 대한 두려움도 출국 이유로 거론됐다.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 다닐 네오노프는 여러 차례 구금되고 10일간 수감된 뒤 올여름 러시아를 떠났다. 무지개색 무늬가 있는 티셔츠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이 극단주의 상징을 드러낸 혐의로 이어졌다. 러시아 당국은 이른바 '국제 성소수자 운동'을 극단주의로 규정해 금지했다. 네오노프는 자신에 대한 형사 절차가 시작될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네오노프는 지난달 반전 성향의 야블로코당을 지지하기 위해 대법원 앞에 모였다가 구금된 뒤 러시아를 떠난 사람들도 알고 있다고 전했다. 당시 대법원은 공개적으로 전쟁에 반대해 온 야블로코당을 총선 투표용지에서 제외했다.

해외 이주를 준비 중인 35세 러시아 남성은 표현의 자유가 없고,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전쟁을 미화하는 선전을 들어야 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AP에 말했다. 그는 10년 넘게 이주를 고민하면서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러시아인들이 "거대한 디지털 감옥"에 살고 있다고 이 남성은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yungh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