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등단 34년 만에 국내 첫 시선집 '헛되이'

기사등록 2026/09/02 17:30:00

8권 시집서 사랑·싸움·일상·가족 등 주제로 골라

일부 작품 다듬고 행 삭제…'Personal Computer'도 수정

[서울=뉴시스] 최영미 시인. 2026.09.02. (사진=뉴시스 DB)

[서울=뉴시스] 조기용 기자 = "유리창에 와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름다워 숨이 멈추었다. 그런 찰나의 황홀함이 시 아닐까. 헛되이 너를 사랑했다." ('작가의 말')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이름을 알린 최영미 시인이 1992년 등단 후 34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선집을  '헛되이'(이미출판사)를 펴냈다. 2019년 첫 영문시선집  'The Party Was Over'를 출간했고, 지난 5월에는 재일한국인 시인 정해옥이 번역한 일본어 시선집 '詩を灯し野にゆく'(시를 밝혀 들로 나서다)가 일본에서 나왔다. 한국어로 엮은 국내 시선집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시선집에는 그동안 펴낸 8권의 시집 가운데 사랑, 싸움, 일상, 시, 가족 등 7가지 주제에 따라 가려 뽑은 시 62편이 실렸다. 첫 시집부터 최근 작품까지 30여 년에 걸친 시 세계를 한 권에 담았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선운사에서' 중)

연애와 이별부터 일상의 풍경,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향한 비판까지 최 시인이 오랜 시간 시로 포착해온 삶의 여러 얼굴이 담겼다.

"같이 있으면 잠을 못 자/ 곁에 없으면 잠이 안 와"('연인'),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독이 묻은 종이'), "엉망인 세상을 내 손으로 정리할 순 없지만/ 수건은 내 맘대로 접을 수 있지"('수건을 접으며') 등이다.

일부 시는 다시 손봤다. 문장부호 등을 고치거나 한두 행을 덜어낸 작품도 있다.

첫 시집에 수록됐던 'Personal Computer'도 수정됐다. 1990년대 컴퓨터 명령어를 시에 끌어들여 기계문명을 풍자한 작품이다.

"새로운 시간을 입력하세요/그는 점잖게 말한다//노련한 공화국처럼/품안의 계집처럼/그는 부드럽게 명령한다/준비가 됐으면 아무 키나 누르세요/그는 관대하기까지 하다" ('Personal Computer' 중)

출판사에 따르면 최 시인은 과거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고 싶어 'Personal Computer'를 썼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컴퓨터의 명령어를 삽입하고 'Personal'이라는 제목을 붙여 기계문명을 풍자했다는 설명이다.

이번 시선집을 엮으면서는 속된 표현이 들어있어 오랫동안 오해를 불러왔던 이 시의 마지막 행을 삭제했다.

출판사는 해당 작품을 "AI 시대를 예고한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마지막 행의 강한 표현 때문에 앞선 시구들이 묻힌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이를 덜어냈다며 "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책의 편집과 배치는  일본에서 출간된  시선집을 참고했다. 표지 사진은 최 시인이 직접 찍었다.

문정희 시인은 추천사에서 "최영미의 시는 벌거벗은 검투사의 창처럼 위험하다"며 "계산이나 사교나 속도에 길들지 않은 호흡으로 위선이 숨을 곳을 차단한다"고 평했다.

[서울=뉴시스] '헛되이' (사진=이미출판사 제공) 2026.09.0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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