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주기 줄이려다 中企 판로 막힐라…유통업계, '정산 35일' 법안 우려

기사등록 2026/09/02 10:43:15 최종수정 2026/09/02 12:00:24

티메프 사태 계기 대금 지급기한 단축 추진

"현금흐름 개선" vs "매입 축소·판로 위축"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서울 시내 한 택배사 물류센터 2026.08.13. hwang@newsis.com


[서울=뉴시스]동효정 기자 = 티몬·위메프(티메프) 사태를 계기로 국회에서 대형 유통업체의 납품업체 대금 지급기한을 단축하는 법안이 추진되면서 유통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납품업체 자금 회전을 앞당겨 거래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지만, 유통업체 현금 부담이 커질 경우 오히려 중소·신생 브랜드의 상품 매입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2소위원회는 전날 직매입 거래의 대금 지급기한을 상품 수령일로부터 현행 최대 60일에서 35일로 단축하는 내용을 담은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연 매출 1000억원 이상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한다. 특약매입과 위수탁, 임대을 거래의 경우에도 대금 지급기한을 판매 마감일로부터 기존 40일에서 20일로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이 정무위 전체회의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대형 유통업체의 납품업체 대금 지급기한은 또 한 차례 단축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1년 중소 납품업체의 현금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대금 지급기한을 최대 60일로 제한한 바 있다.

이번 법안 추진 배경에는 티메프 사태 이후 커진 판매자 정산 안정성에 대한 요구가 있다. 정산 지연으로 납품업체의 자금난이 심화될 수 있는 만큼 대금 지급 시기를 앞당겨 중소업체의 현금 흐름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유통업계에서는 직매입 거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규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서울 강남구에 위치했던 티몬. 2025.08.05. xconfind@newsis.com

직매입 유통업체는 납품업체로부터 상품을 미리 매입해 재고를 보유하고, 이후 실제 판매 여부와 관계없이 약정된 기한 내 대금을 지급하는 구조다. 패션과 가구, 계절상품 등은 매입 이후 실제 판매까지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

대금 지급기한이 짧아질 경우 유통업체는 상품 판매 이전에 더 많은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이에 따라 자금 부담이 커지면 상품 매입 규모를 줄이거나 판매 회전율이 높은 상품 위주로 상품 구성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산기한이 짧아지면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판매 여부와 관계없이 더 빠른 시점에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자금 부담이 커질 경우 회전율이 높은 대형 브랜드 상품 중심으로 매입이 집중되고, 판매 기간이 긴 시즌 상품이나 중소·신생 브랜드의 입점 기회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강형구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정산기한 단축으로 매입채무 지급일수가 짧아지면 기업은 추가 운전자본을 조달해야 하고 그만큼 자금 조달 비용도 늘어난다"며 "연간 매입 규모가 큰 유통업체일수록 정산기한 단축에 따른 재무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유통업계의 거래 구조와 산업 특성을 고려해 정산기한을 일률적으로 단축하기보다는 일정 수준의 예외를 두는 사례가 많다.

유럽연합(EU)은 대금 지급 지연 규정을 통해 일반적인 거래의 지급기한을 두면서도 납품업체와의 합의나 상품 특성 등에 따라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특히 재고 보유 기간이 길거나 계절적 특성이 강한 상품의 경우 거래 구조에 따라 보다 긴 지급기한이 적용될 수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 국가의 대형 유통업체 역시 거래 유형과 상품 특성에 따라 납품업체별 정산 조건을 다르게 운영하고 있다. 아마존과 월마트, 코스트코, 베스트바이 등 글로벌 유통기업들도 일률적인 정산기한보다는 거래 조건과 상품 특성 등을 고려해 지급 조건을 설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산기한 단축 자체보다 거래 구조별 특성을 반영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유병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연구를 통해 이커머스 정산주기를 60일에서 20일로 축소할 경우 직매입 플랫폼의 운전자본 부담이 증가하면서 거래 규모가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유 교수는 직매입 방식의 경우 플랫폼이 상품을 직접 구매해 재고를 보유하는 구조인 만큼 정산주기 단축이 기업의 자금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정산기한이 짧아지면서 유통업체가 직매입을 줄이고 특약매입이나 위수탁 거래를 늘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약매입과 위수탁 거래는 실제 판매 이후 정산하는 방식이어서 유통업체의 재고 부담은 줄일 수 있지만, 중소 납품업체 입장에서는 거래 조건에 따라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서울=뉴시스] 김명년 기자 = 설 연휴를 앞둔 11일 오전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물류센터에서 직원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2026.02.11. kmn@newsis.com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대규모 유통업의 거래유형 분석과 정책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거래 유형에 따라 불공정 거래 발생 양상에도 차이가 나타났다. 특약매입 거래의 경우 직매입보다 거래 과정에서 불공정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게 나타난 만큼 거래 방식의 변화가 납품업체에 미칠 영향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납품업체 보호라는 법안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유통업체의 자금 상황과 거래 유형을 고려한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동일 한국유통학회 명예회장(세종대 교수)은 "티메프 사태의 핵심은 정산주기 자체보다는 기업의 자금 관리와 지급 능력에 대한 문제로 볼 필요가 있다"며 "정산기한 단축이 실제로 납품업체 보호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통업체의 재무 건전성과 거래 안정성을 함께 살피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형구 교수도 "급격한 정산기한 단축은 유통업체의 매입 규모와 상품 구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중소기업의 판로 확대와 납품대금의 안정적인 지급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함께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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