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때부터 애착인형과 세계여행…코라크릿이 불러낸 ‘유령들

기사등록 2026/08/27 15:51:02 최종수정 2026/08/27 16:10:10

부산 국제갤러리서 ‘제의를 품은 신체들’

태국의 애니미즘적 세계관 작업의 토대로

회화·영상·재로 인간과 비인간, 기억의 경계 탐구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태국 현대미술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가 27일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 ‘제의를 품은 신체들(Post Ritual Bodies)’ 기자간담회에서 세 살 때부터 간직해온 애착인형을 들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인형은 현재 작가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2026.08.27.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부산=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세 살 때부터 함께한 작은 인형이 이제 그와 세계를 여행한다.

태국 현대미술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40)가 27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낡은 애착인형 하나를 두 손에 올려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인형이다. 한동안 비닐 안에 보관돼 있던 이 작은 존재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작가와 함께 세계 곳곳을 다닌다.

“어디에 갈 때마다 이 인형을 가지고 갑니다.”

코라크릿에게 이 인형은 단순한 추억의 물건이 아니다. 한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기억과 관계를 축적한 또 하나의 ‘신체’다.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28일 개막하는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개인전 ‘제의를 품은 신체들(Post Ritual Bodies)’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몸을 넘어 사물과 공간, 이미지에도 기억이 깃들 수 있는지를 묻는다.

지난 10여 년간 회화와 조각, 영상, 퍼포먼스를 넘나들어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가족과 애착인형을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이 어떻게 기억을 품고 순환하는지를 신작으로 풀어냈다.

코라크릿은 태국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을 작업의 중요한 토대로 삼는다.

27일 부산 국제갤러리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태국에서는 산이나 나무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애니미즘적 사유를 사람이 만든 건물이나 전시장 같은 비인간적 존재에도 적용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태국 현대미술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가 27일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 ‘제의를 품은 신체들(Post Ritual Bodies)’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6.08.27.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를 ‘보는’ 회화
전시장에 걸린 회화는 얼핏 추상화처럼 보인다. 푸른색과 검은색 사이로 빛이 번지고 이미지의 흔적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단순히 물감을 칠한 그림이 아니다.

작가는 홀로그램에 사용되는 반투명 스크린 위에 안료와 폴리머를 겹친다. 여기에 애착인형의 영상을 투사한다. 영상이 화면에 닿는 순간을 다시 사진으로 촬영해 회화 표면에 인화한다.

회화가 영화를 보고, 그 순간을 자신의 몸에 기억하는 셈이다.

코라크릿은 “회화 그 자체가 기억을 품는 동시에 영상을 보는 존재이자 영상이 비춰지는 대상이 된다”고 설명했다.

스크린은 두 전시장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다. 프로그래밍된 빛이 반투명한 화면을 통과해 앞뒤 공간을 오간다. 작가는 이를 두 공간이 빛을 통해 나누는 ‘대화’로 본다.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On the beautiful tale you followed〉 2026 Acrylic polymer, UV print, and polyurethane on laser mesh 178 x 145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그의 관심은 결국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홀로그램 영상을 작업해온 그는 밝은 빛과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부분이 공간을 만드는 특성에 주목했다. 이후 영상에서 하나씩 덜어내기 시작했다.

“영상이 투사되지 않아도 그것을 필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로젝터의 빛이 아니라 전구나 태양빛만 비추어도 그것이 필름이 될 수 있을까.”

이미지를 없애고 빛마저 걷어낸 뒤에도 영화는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고스트 레이어(Ghost Layer)’라는 작업 방식으로 발전했다. 무언가를 계속 더하는 대신 비워낸다. 역설적으로 사라진 자리는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태국 현대미술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가 27일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 ‘제의를 품은 신체들(Post Ritual Bodies)’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6.08.27.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
‘유령’은 코라크릿의 작업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쇳말이다.

그는 동남아시아에서 현대의 영상 기술과 오래된 영혼의 믿음이 결합해온 역사에도 관심을 둔다.

전쟁 중에는 헬리콥터에서 죽은 사람의 목소리처럼 만든 음향을 틀어 적군을 심리적으로 동요시키거나 숲에 빛과 영상을 투사해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타난 것처럼 만드는 방식이 사용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남겨진 영상 기술은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코라크릿은 태국에서 전쟁 후 남겨진 프로젝터가 사찰과 숲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승려들은 영혼을 위해 영화를 상영했고,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전쟁과 권력의 도구였던 기술이 어느 순간 영혼과 만나는 의례의 장치가 된 것이다.

코라크릿에게 유령은 공포영화 속 존재가 아니다.

몸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과 흔적에 가깝다.

전시장에는 작가가 직접 쓴 기도문을 태우고 남은 재를 이용한 작업도 놓였다. 태국에서 경작이 끝난 농작물을 태우고 남은 재도 작품의 재료가 된다.

불은 모든 것을 없애는 동시에 새로운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 역시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사람들의 재 위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제의를 품은 신체들’이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태국 현대미술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가 27일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 ‘제의를 품은 신체들(Post Ritual Bodies)’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6.08.27.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람만 신체를 갖는 것이 아니다. 낡은 인형도, 빛을 받아들인 스크린도, 불타고 남은 재도 시간을 품는다. 작가에게 살아 있는 인간과 사물의 경계는 그렇게 조금씩 흐려진다.

1986년 태국 방콕에서 태어난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는 현재 방콕과 뉴욕을 오가며 활동한다.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미술학사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미술학 석사를 받았다. 회화와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결합하며 기억과 애니미즘, 기술과 신체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휘트니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에 참여했으며 그의 작품 은 뉴욕 휘트니 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오슬로 아스트루프 펀리 현대 미술관, 런던 자블루도비치 컬렉션, 난징 시팡 미술관 등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전시는 10월31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