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세균 잡는 바이러스' 통째로 설계…285개 중 16개 작동

기사등록 2026/08/07 16:31:49

AI 설계안 DNA로 합성해 비병원성 대장균에서 시험

여러 파지 섞자 자연 파지 안 듣던 대장균 두 균주 성장 억제

사람·동물 대상 연구 아냐…치료 효과·안전성은 미검증

[서울=뉴시스]인공지능 에보(Evo)가 설계한 바이러스의 원자구조도. 2026.8.7.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미국 연구진이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세균을 감염시켜 죽이는 바이러스의 유전정보 전체인 ‘유전체’를 설계했다. 이 바이러스는 ‘박테리오파지’, 줄여서 ‘파지’라고 한다. AI가 내놓은 설계안 285개를 실험실에서 실제 DNA로 만들어 시험한 결과, 16개가 대장균을 감염시키고 증식했다.

영국 가디언은 6일 연구 결과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됐다고 보도했다. 연구진은 생성형 AI로 파지의 유전체 전체를 설계하고 실제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첫 사례라고 밝혔다. 이번에 만든 것은 세균만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로, 사람이나 동물을 감염시키지 않는다. 실험도 비병원성 대장균을 대상으로 배양접시에서 진행됐다.

파지는 세균 표면에 달라붙어 자기 유전정보를 넣고 세균 안에서 증식하는 바이러스다. 이번 연구의 바탕이 된 자연 파지 ‘파이엑스174’(ΦX174)는 증식을 마친 뒤 대장균을 터뜨려 죽인다. 사람이나 동물의 세포에는 감염되지 않는다.

이런 특성 때문에 파지는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세균 감염을 치료할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파지마다 감염시킬 수 있는 세균의 종류가 제한돼 있어 환자의 세균에 맞는 파지를 찾아야 한다. 세균이 특정 파지의 공격을 피하도록 변하면 그 파지도 더는 듣지 않을 수 있다.

브라이언 하이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 조교수 연구팀은 ‘에보 1’과 ‘에보 2’라는 AI 모델을 사용했다. 챗GPT 같은 대형언어모델이 수많은 문장을 학습해 다음에 올 단어를 예측한다면, 에보 모델은 DNA를 구성하는 A·T·G·C 네 가지 염기의 배열을 학습해 다음에 올 유전서열을 만든다.

에보 모델은 200만개가 넘는 파지의 유전정보를 학습했다. 연구진은 여기에 파이엑스174와 같은 계열의 파지 유전체 1만4000여개를 더 학습시켜 파이엑스174와 비슷한 새 설계안을 만들도록 했다.

AI는 수천개의 후보를 내놓았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대장균을 감염시킬 가능성과 유전체의 완성도 등을 따져 285개를 골랐다. 이어 각 유전체를 DNA로 합성해 비병원성 대장균에 넣어 새 파지가 만들어지도록 했다. 그 결과 16개가 실제로 다른 대장균을 감염시키고 증식했다. AI가 설계했다고 모두 작동한 것은 아니어서 실험을 통한 선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도 확인됐다.

연구진은 AI가 설계한 파지 여러 개를 섞어 자연 파이엑스174 계열 파지가 듣지 않던 대장균 두 균주에도 투입했다. 혼합물에 든 파지들은 두 균주를 감염시켜 성장을 억제했다. 다만 배양접시에서 기술의 작동 가능성을 확인한 초기 실험일 뿐, 동물이나 사람에게서 치료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한 것은 아니다.

파지는 세균 표면의 특정 구조를 알아보고 달라붙기 때문에 열쇠와 자물쇠처럼 서로 맞아야 한다. 세균의 표면 구조가 바뀌면 기존 파지는 감염시키지 못할 수 있다. 연구진은 AI로 서로 다른 ‘열쇠’를 빠르게 만들어 여러 파지를 함께 사용하면 세균이 한 종류의 파지를 피하더라도 대응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치료에 맞는 파지를 자연에서 일일이 찾는 시간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 성과가 주목받는 이유는 동시에 위험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AI가 완전한 바이러스 유전체를 설계하고, 그 설계도로 실제 바이러스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안전을 위해 AI 학습자료에서 사람·동물·식물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의 유전정보를 제외했다. 또 유전체 전체를 설계하는 연구에는 안전·보안 전문가가 처음부터 참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 존스홉킨스대 보건안보센터의 토머스 잉글스비와 모리츠 한케는 이 논문과 함께 사이언스에 실린 논평에서 “AI로 바이러스 유전체를 설계하는 기술은 등장했지만 이를 안전하게 관리할 통제체계는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같은 기술로 사람이나 동식물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까지 만들 수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두 전문가는 기존 방역·치료 수단이 듣지 않는 새로운 병원체가 만들어질 위험이 있다며 사람이나 동식물의 병원체를 대상으로 이런 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톰 엘리스 임페리얼칼리지런던 합성유전체공학 교수는 이런 위험이 당장 현실화할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파이엑스174는 유전체가 염기 5386개, 유전자 11개로 이뤄진 매우 작고 단순한 바이러스다. 크고 복잡한 바이러스를 AI로 처음부터 설계하기는 훨씬 어렵다는 것이다. 엘리스 교수는 완전히 새로운 병원체를 설계하는 것보다 기존 병원체의 전염성이나 독성을 높이는 ‘기능획득’ 변형이 더 쉽고 현실적인 위험이라고 평가했다.

필리파 렌초스 킹스칼리지런던 과학·국제안보 연구자는 AI 모델만 규제해서는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AI 모델의 개발과 이용을 통제하고, 연구계획의 안전성을 심사하는 한편 DNA 제조업체가 위험한 유전서열의 합성 주문을 걸러내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 바이러스를 다루는 실험실에도 생물안전·생물보안 기준을 함께 적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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