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디바' 에보라 "카보베르데, 작은 나라여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기사등록 2026/07/04 13:00:29

[월드컵 & 세계음악기행] 카보베르데 ②

카보베르데 대표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

2002년 내한공연 등 韓과도 인연

[마이애미 가든스=AP/뉴시스] 카보베르데 골키퍼 보지냐가 3일(현지 시간) 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32강전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마친 후 아쉬운 표정으로 경기장을 벗어나고 있다. 월드컵 첫 출전인 카보베르데는 2연패를 노리는 아르헨티나와 연장 접전까지 가는 이번 대회 최고의 명승부 끝에 자책골로 2-3으로 패하며 아쉽고도 위대한 여정을 마쳤다. 2026.07.04.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프티 페이, 즈 템 보쿠(Petit pays, je t'aime beaucoup)"(작은 나라여,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아프리카 서해안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를 향해 세계가 부르는 연가는 끝내 애상곡으로 맺음했다. 4일(한국시간) 미국 마이애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32강전. 카보베르데는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와 120분의 연장 혈투 끝에 2-3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이 패배는 몰락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저항이었다. 스포츠 역사상 최대 이변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렸음에도, 전 세계는 이들에게 '졌지만 잘 싸웠다'(졌잘싸)는 흔한 수사를 넘어선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앞서 필자도 카보베르데, '위대한 이변'…'맨발의 디바' 세자리아 에보라 '묵직한 유산'라는 기사로 존중을 드러냈는데, 이번에도 역시 경탄했다.

그 중심에는 골키퍼 보지냐가 있었다. 선방 8개를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선수 리오넬 메시를 쩔쩔매게 한 그의 도약은, 마치 중력을 거스르려는 필사적인 날갯짓과 같았다. 메시의 예리한 궤적을 튕겨내는 보지냐의 두 손은 단순히 공을 막아낸 것이 아니라, 거대한 절망 앞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한 국가의 자존심을 지켜낸 굳건한 방패였다. 기적은 종종 승리자의 전유물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부서지지 않고 버텨낸 이들의 땀방울 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이 단단한 투혼의 기저에는 카보베르데의 영혼을 지탱해 온 묵직한 운율이 흐른다. 이들의 그라운드는 카보베르데의 대표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1941~2011)가 전 세계에 발신했던 위로의 정서, '소다드(Sodade)'와 맞닿아 있다. 식민 지배의 상흔과 척박한 토양,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산의 아픔을 노래했던 에보라의 전통 음악 '모르나(Morna)'는 고통을 기품 있게 승화시키는 법을 가르쳐줬다.
[마이애미가든스=AP/뉴시스]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32강 카보베르데와 경기에서 맹활약한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 2026.07.03.
카보베르데 전통 음악 모르나는 영어 단어 '슬퍼하다(mourn)'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짙은 애수를 띤다. 아프리카 토속 리듬을 뼈대 삼고, 그 위에 포르투갈 전통 음악 파두(Fado), 브라질 서정 음악 모디냐, 영국 뱃사람들의 발라드가 겹겹이 쌓였다. 식민지 종주국의 양식인 파두에 서아프리카의 흐느적거리는 퍼커션이 복합된 이 음악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이들의 아픔과 그들을 향한 노스탤지어적 그리움으로 압축된다.

무대 위에서 늘 신발을 벗고 노래했던 '맨발의 디바'처럼, 카보베르데 선수들 역시 어떠한 장식이나 허세 없이 온몸을 내던져 세계의 정점과 맨살로 부딪혔다.

인구 53만 명. 대한민국 경남 김해시의 인구수와 맞먹는 이 작은 나라는 영토와 자원의 크기가 한 국가의 위대함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묵묵히 증명했다. 2002년 내한한 적이 있는 에보라가 세계 최고 권위의 극장을 맨발로 장악하며 목소리의 심연만으로 척박한 대지의 슬픔을 위로했듯, 카보베르데의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에보라의 노래가 그랬듯, 이들의 축구 역시 단단하게 견뎌낸 슬픔이 어떻게 위대한 기적의 토양으로 싹을 틔우는지를 보여주는 묵직한 메타포다.
[이스라엘=AP/뉴시스] 세자리아 에보라
에보라의 대표곡 중 하나인 '프티 페이(Petit Pays)'는 카보베르데인들의 이산과 향수를 영혼의 언어인 토착어 크리올루(Kriolu)로 읊조리며 척박한 땅의 애환을 기품 있게 축조한다. 이어 곡의 끝자락에 이르러 보편적 언어인 프랑스어 후렴구('Petit pays, je t'aime beaucoup')를 빌려 사랑을 직관적으로 선언하는 이 매혹적인 교차는, 세상의 눈에 띈 작은 점에 불과한 나라일지라도 그 안의 삶과 투쟁은 결코 작지 않음을 더 넓은 세상으로 타전하는 묵직한 미학적 성취다.

비록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의 항해는 멈췄으나 이들의 서사는 이제 막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가난과 척박함 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거장을 잉태하고, 거함의 맹폭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선수들을 길러낸 곳. 세상의 기준으로는 지도상의 작은 점에 불과할지라도, 카보베르데가 쏘아 올린 삶과 투쟁의 위대함은 결코 작지 않다. 그렇기에 세계는 아낌없는 찬사와 함께 기꺼이 이 아름다운 후렴구를 합창한다. 즈 템 보쿠(je t'aime beaucoup). "우리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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