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인민일보, 6·25 앞두고 참전 정당성 주장 “세균전도 저지”

기사등록 2026/06/18 15:43:18 최종수정 2026/06/18 17:04:24

“미국 38도선을 넘어 한중 접경 지역까지 진격해 파병” 주장

중공군 참전으로 유엔군 밀려 내려와 교착 상태 후 휴전 협정

시진핑, 북러 견제 필요 때문에 방북 정상회담에서 북핵에 침묵

[선양=신화/뉴시스] 2024년 11월 29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의 열사능원에서 6·25 전쟁 중국군(중공군) 전사자 안장식이 열려 의장대가 한국에서 송환한 중국군 유해를 운구하고 있다. 2026.06.18.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8일 6·25 전쟁을 1주일 앞둔 가운데 참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글을 실었다.

신문은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미국은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파견하고 10월 초에는 대담하게도 38도선을 넘어 한중 접경 지역까지 진격했다”고 중공군의 참전 배경을 설명했다.

신문은 “미군 항공기가 접경 지역을 반복적으로 폭격해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며 임박한 전쟁 위협에 직면해 군대를 파병했다고 주장했다.

시진핑 총서기(국가주석)는 “항미원조전쟁(미국에 대항에 조선을 지원한다는 6·25에 대한 중국의 주장) 승리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로 중국과 세계 모두에 크고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고 발언한 것도 소개했다.

중국이 6·25 전쟁에 참가한 군대를 부르는 명칭인 ‘인민지원군’ 병사들은 기본적인 무기만 가지고 얇은 솜옷을 입고 있었던 반면 적군은 완전무장한 상태로 극도로 불균형적이고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신문은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그럼에도 중국군(중공군)은 운산 전투, 장진호 전투 등 5차례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으며 ‘교살전’을 격퇴하고 ‘세균전’을 저지했다고 주장하면서 19만 7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6·25 전쟁에서 세균전 위험이나 이를 저지했다는 주장은 나온 적이 없다.

신문은 1953년 7월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서방 침략자들이 동해안에 대포 몇 문만 설치하면 한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던 시대는 영원히 끝났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6·25 발발을 앞두고 랴오닝성 선양에 있는 순국열사묘지를 소개하면서 ‘항미원조’ 정신은 시대를 넘어 새롭게 남아있다고 전했다.

이곳에는 4월에 전장에서 수습한 중국군 유해 12구가 13차로 송환되어 안장됐다. 국방부는 국제법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2014년부터 2025년까지 총 1011구의 중국군 유해를 송환한 바 있다.

6·25는 북한 김일성이 소련 조지프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의 지지를 업어 기습 남침하면서 시작됐다.

북한군은 한 때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으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돼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그해 10월 25일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밀려 내려온 뒤 38선 인근에서 교착상태를 이루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중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해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했으나 핵 보유국을 선언한 김정은 정권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시 주석은 8∼9일 7년만에 방북한 뒤 가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회담에서는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포탄과 병력을 파병하는 등 러시아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는 중국이 북한을 영향권내에 유지하기 위해 북에 민감한 비핵화 이슈를 꺼내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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