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경제 결제 비중 1% 미만…코인 거래가 주된 용도
체이널리시스 "불법 암호화폐 활동 84%가 스테이블코인"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현지시간) 스테이블코인이 암호화폐의 대표적 실용 사례로 주목받고 있지만, 민간 화폐의 과거 실패처럼 신뢰가 흔들릴 경우 금융시장 전반으로 충격이 번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제재 회피와 돈세탁 등 불법 암호화폐 활동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84%에 달한다. 캔자스시티 연은 연구는 스테이블코인 사용 중 실물경제 결제 비중이 1% 미만이라고 결론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등 기존 통화에 가치를 고정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다.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크게 출렁이는 암호화폐와 달리, 국채나 은행 예금 등 자산을 담보로 보유해 1코인을 1달러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시장 규모도 빠르게 커졌다. 가상자산 정보업체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발행 잔액은 약 3000억달러에 이른다. 테더가 약 1900억달러, 서클이 약 760억달러 규모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옹호론자들은 이를 기존 은행망보다 빠르고 저렴한 결제 수단으로 본다. 특히 국경 간 송금과 결제에서 중개 비용을 줄이고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WSJ은 스테이블코인이 공적 화폐의 신뢰를 빌려 쓰면서도 기존 결제·정산 체계 밖에서 움직인다는 데 근본적 모순이 있다고 짚었다.
은행 예금도 민간이 만든 돈의 성격을 갖지만, 은행은 필요할 경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서 유동성을 공급받을 수 있고 은행 간 결제도 연준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다. 이 때문에 예금 1달러는 어느 은행에서나 1달러로 통용된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발행사별 자체 인프라를 통해 움직인다. 테더와 서클의 코인은 1개가 1달러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됐지만, 실제 거래소에서는 수요와 불안 심리에 따라 0.999달러나 1.001달러처럼 1달러에서 조금씩 벗어난 가격에 거래되곤 한다. 평소에는 작은 차이지만, 신뢰가 흔들릴 때는 “정말 1달러로 돌려받을 수 있느냐”는 불안으로 번질 수 있다.
문제는 발행사가 민간기업이라는 점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와 관련 플랫폼은 이용자를 늘리고 수익을 키우려는 유인을 갖고 있다. 이용자에게 보상을 지급하거나, 담보자산을 굴려 더 높은 수익을 내려는 압력이 생길 수 있다.
미국에서 논의 중인 클래리티법은 예금 이자와 유사한 지급을 금지하되, 사용 실적에 따른 보상은 허용하는 방향이다. WSJ은 암호화폐 업계가 그동안 법적 경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만큼, 보상 제도가 사실상 이자처럼 설계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이 경우 보유자들이 한꺼번에 코인을 팔거나 달러 상환을 요구하는 ‘런’이 발생할 수 있다. 발행사는 상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 자산을 급히 팔아야 하고, 이 과정에서 충격이 다른 금융시장과 은행권으로 번질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서명한 지니어스법은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스테이블코인이 국채나 은행 예금 등 안전하고 유동적인 자산을 담보로 보유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마이클 바 연준 이사는 담보로 인정되는 은행 예금이 예금보험 대상이 아닐 수 있고, 환매조건부채권 거래 등을 통해 외국 자금이 유입될 여지도 있다며 법의 허점을 지적했다.
미국 밖에서 운용되는 코인에는 법 적용이 미치지 않는 문제도 남아 있다. 테더의 주력 코인인 USDT가 대표적이다. 테더는 미국 규정에 맞춘 별도 코인 USAT를 내놓았지만, 기존 주력 코인은 여전히 미국 법의 직접 적용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WSJ은 스테이블코인 논란이 미국의 과거 민간 화폐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1837년부터 1863년까지 이어진 자유은행 시대에는 은행들이 자체 화폐를 발행했지만, 은행권마다 가치가 달라지고 사기도 빈발했다. 지역 밖에서는 특정 은행권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도 많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머니마켓펀드가 1달러 가치를 지키지 못한 사례도 있다. 당시 한 펀드가 보유 자산 손실로 1달러 상환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시장 전반에 불안이 확산됐다.
민간 화폐는 신뢰가 깨지는 순간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 WSJ은 위기 때 공급을 늘릴 수 있는 공적 화폐와 달리, 민간 화폐는 오히려 위축되며 경제 스트레스를 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스테이블코인은 사라지기 어려운 흐름으로 평가된다. 결제 기술의 자연스러운 진화라는 점에서 이를 제도권 밖에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니어스법과 클래리티법도 스테이블코인을 더 안전하고 주류 금융시장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려는 시도다.
은행권도 대안을 준비하고 있다. 은행들은 블록체인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기존 달러 체계와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토큰화 예금’을 제시하고 있다. WSJ은 은행 역시 과거 여러 차례 금융위기를 일으켰지만, 그 경험 때문에 강한 규제와 연준 체계 안으로 편입됐다며 스테이블코인도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될 수 있다고 짚었다.
◎공감언론 뉴시스 yungh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