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배경 된 서울 한옥 ③종로구 운현궁

기사등록 2026/05/11 06:02:00
‘운현궁’의 ‘노안당’.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허무는 '차경'(借景)의 미학이 5월의 신록 속에서 더욱 빛난다.

서울관광재단(대표이사 길기연)이 일상의 소란을 걷어내고 쉼과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서울 시내 한옥 명소들을 소개한다.

서울의 역사적 정체성을 간직한 동시에 드라마·영화 등 K-콘텐츠의 배경이 된 고택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국의 전통 건축은 ‘자연을 빌려 내 정원으로 삼는다’는 철학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이는 웅장한 '고대광실'(高臺廣室) 기와집부터 소박한 초가집까지 모두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다.

하늘과 산, 물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한옥의 유연함은 현대 건축이 놓치기 쉬운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화두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차경은 '물욕'(物欲)을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했다. 자연을 굳이 억지로 소유하려 들지 않고 잠시 빌려 즐기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담장 너머 풍경을 내 마당처럼 품어내는 이 비움의 미학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한옥이 현대인에게 특별한 치유의 공간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서울관광재단은 한옥의 자태를 만끽하며 가치를 재발견하는 여정을 제안한다. '북촌한옥마을' 코스는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도보로 관광지들을 탐방한다.

‘운현궁’에서 시작해 ‘석정보름우물터’, ‘중앙중·고등학교’, ‘가회동성당’을 지나 ‘정독도서관’과 ‘백인제 가옥’까지 둘러본다.

‘서울도보관광’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김정환 관광전문 기자 = ◆돌담 안 역사와 쉼

낮지만 두터운 돌담 안, 도심의 소음에서 한발 비켜난 고요함 속에 역사의 밀도가 응축된 공간이 있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운현궁’이다.

조선 제26대 고종(1852~1919)의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이자 부친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사저로 조선 말기 권력의 중심부였다.

운현궁은 일반 사대부 가옥과 달리 궁궐에 준하는 규모와 배치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1864년(고종 1년) 대규모 증축 당시에는 고종이 머물던 법궁인 ‘창덕궁’과 직접 연결되는 ‘경근문’과 ‘전양문’까지 설치됐다. 이는 운현궁이 단순한 사저를 넘어 법궁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권력의 중추였음을 보여준다.

비록 전용 문들을 포함한 거대한 규모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축소됐으나,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며 정치를 구상하던 사랑채인 ‘노안당’과 안채인 ‘노락당’, 별당인 ‘이로당’ 등 남은 건축물은 여전히 궁궐에 버금가는 건축미를 보여주며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력과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매년 봄·가을 이곳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1851~1895)의 ‘가례’ 재현식이 열려 훼손됐던 왕실 문화의 원형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올해 봄 행사는 4월25일 거행했고, 가을 행사는 9월26일 열릴 예정이다.

운현궁은 ‘무료 관람제’로 운영돼 시민 누구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도심 속 휴식처 역할을 한다. 점심 무렵에는 인근 직장인들이 들러 산책하며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다.
‘운현궁’의 ‘이로당’과 그 너머로 보이는 ‘양관’.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한옥 마당 너머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2층 저택인 ‘양관’(洋館)이 있다.

1912년께 일제가 구황실 인사를 회유할 목적으로 선대의 사당 자리에 지은 건물이다.

일본인 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가 설계한 이 건물은 아치형 외관과 전면 베란다가 어우러진 화려한 서양식 조형미를 갖췄다.

그러나 건물 외벽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화문’(李花紋)은 이곳이 대한제국 황실의 공간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침탈의 역사 속에서도 지켜낸 대한제국의 공식 문장(紋章)은 양관의 화려한 외관보다 더 깊은 역사적 무게를 지닌다.

현재 이 건물은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부지에 편입돼 일반인은 운현궁 담장 밖에서 외관만 조망할 수 있다.

운현궁은 각종 미디어 촬영지로 자주 활용돼 왔지만 대중에게 익숙한 배경은 전통 한옥 전각보다 양관이다. 운현궁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풍경으로 꼽히는 공간의 반전인 셈이다.

MBC ‘궁’(2006)에서 황태자 ‘이신’(주지훈)의 거처로 등장한 것을 비롯해 KBS ‘각시탈’(2012), MBC ‘더킹 투하츠’(2012)의 주요 배경으로 활용됐다. 특히 최고 시청률 20.5%를 기록한 tvN ‘도깨비’(2016)에서는 ‘김신’(공유)의 집으로 등장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넓혔다. 최근에는 ‘21세기 대군부인’의 주요 배경으로 활용되며 다시 주목받았다.
‘서울우리소리박물관’의 민요 청음.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운현궁의 역사적 맥락은 지척인 종로구 율곡로 ‘서울우리소리박물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흥선대원군은 생전 판소리 등 전통 소리를 아끼고 후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 양식이 결합된 이 박물관은 전국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향토 민요’를 수집·보존하는 국내 최초 민요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핵심 자산은 MBC가 1989년부터 30여 년간 전국 900여 마을을 방문해 채록한 음원 데이터 2만여 점이다.

전시실에서는 농요와 뱃노래, 사당패 노래는 물론 상여소리와 호상놀이까지 서민의 생활사가 투영된 무형의 유산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관람객은 비치된 청취 시스템을 통해 소멸해가는 민요의 원형을 감상하며, 우리 소리가 지닌 고유한 정서와 문화적 가치를 되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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