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킹 헤즈가 매료된 '韓 사이키 팝'…장영규 이날치, K팝 '대안적 생태계' 짓다

기사등록 2026/04/26 10:36:15

美 명문 인디 레이블 '루아카 밥'과 계약

토킹 헤즈 리더 데이비드 번 설립

글로벌 첫 싱글 '떴다 저 가마귀' 전 세계 동시 발매

6월 캐나다 주요 재브 페스티벌 시작으로 월드투어

[서울=뉴시스] 이날치. (사진 = 하이크 제공) 2026.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가 대형 자본과 철저하게 기획된 팬덤 중심의 K-팝 공식에서 벗어나, 가장 독자적이고 대안적인 방식으로 글로벌 음악 생태계에 뛰어들었다. 거대한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오직 밴드 고유의 음악적 물성과 태도만으로 일궈낸 성취다. 예술의 고유성이란 결국 세계를 대하는 치열한 '태도'가 낳은 필연적인 결론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무대 위에서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이날치는 최근 미국의 명문 인디 레이블 '루아카 밥(Luaka Bop)'을 통해 글로벌 첫 싱글 '떴다 저 가마귀'를 전 세계 동시 발매했다. 루아카 밥은 미국의 전설적인 뉴웨이브 밴드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이 설립한 곳이다. 장르와 국적의 경계를 허무는 '진짜 음악'을 큐레이션해온 이들이 이날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양측은 약 1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신중하게 교류하며 서로의 음악적 지향점을 확인했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소속사 하이크에서 만난 이날치의 장영규(베이스·프로듀서)는 이 이례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의 배경에 대해 "데이비드 번이 토킹 헤즈를 하면서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음악인들과 만나 작업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깊은 고민들, 즉 '자신들의 음악과 다른 세계의 음악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태도가 우리가 판소리와 밴드 음악을 결합하며 하고 있는 고민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고 짚었다. "저희가 작업하는 방식과 그 안에 담긴 치열함에 대해 그들이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치 '다 해본 거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음악이 지닌 가치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레이블이 먼저 다가와 준 것은 큰 행운입니다."

◆극장에서 조우한 '토킹 헤즈'…세대와 장르를 관통하는 그루브

서구권 음악 관계자들과 평단은 일찍이 '범 내려온다' 등으로 주목받은 이날치의 음악에서 토킹 헤즈나 LCD 사운드시스템의 에너지를 읽어냈다.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이들의 런던 공연을 보고 "음악과 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았다"고 극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영규와 번의 교차점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장영규는 "어릴 때는 그저 (토킹헤즈의) '사이코 킬러(Psycho Killer)'라는 이름만으로도 열광했어요. 그 음악이 시작될 때 뿜어내는, 지적이면서도 반항적인 에너지가 좋았다"고 회상했다. 묘한 인연도 있었다. 장영규는 "2000년대 초반 광주 비엔날레 개막 공연 직후, 한 술집에 데이비드 번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며 예술계 전반에 뻗어 있는 그의 오랜 탐구심을 언급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날치에 새로 합류한 젊은 소리꾼들은 토킹 헤즈의 음악을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해 전주 공연 당시 짬을 내어 단체로 극장을 찾아 토킹 헤즈의 전설적인 라이브 필름 '스탑 메이킹 센스(Stop Making Sense)'를 관람했다. 시대를 초월한 그루브는 스크린을 뚫고 젊은 소리꾼들에게 가닿았다.

최수인은 "공연 전체가 하나의 완성본처럼 너무나 유기적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멤버들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 세밀하게 와닿았다"고 했다. 박수범 역시 "전에 본 적 없는, 어떻게 보면 이상하다고 할 정도의 춤 동작들인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왜 계속 궁금하고 보고 싶지'라는 강렬한 끌림이 있었다"며 "데이비드 번 선생님이 마치 지휘자처럼 무대 위 모두를 아우르는 모습이 경이로웠다"고 경의를 표했다.

◆'떴다 저 가마귀'…어택과 그루브가 빚어낸 청각적 쾌감과 이면의 미학

[서울=뉴시스] 루아카 밥 로고. (사진 = 루아카 밥 제공) 2026.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 신곡 '떴다 저 가마귀'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가장 난도가 높고 남성적인 서사가 주를 이루는 '적벽가'의 한 대목을 차용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도망가는 절박하고 긴박한 서사 위에, 불길한 징조로서의 '가마귀'가 등장하는 미학적 순간을 펑키한 리듬으로 포착해 냈다. 두 대의 베이스와 드럼이 직조하는 묵직한 패턴 위로, 네 명의 보컬이 내뱉는 강한 타격감의 소리들이 파편처럼 얹어진다.

이 곡의 탄생 비화는 이날치 특유의 직관적 에너지를 방증한다. 장영규는 "루아카 밥 측에서 기존 곡들을 모아 EP를 내자고 제안했을 때, 새 멤버들의 숨결이 들어간 신곡이 없으면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아 정말 순식간에 급하게 만들어 보낸 곡"이라며 "처음엔 별 반응이 없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이 곡이 첫 싱글로 낙점되는 극적인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통 판소리가 지닌 '이면(숨겨진 뜻이나 정서)'을 밴드 사운드로 번역하는 과정은 지난한 '줄타기'의 연속이었다. 최수인은 "대중가요처럼 첫 박에 강세를 주면 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소리가 가진 본질적인 느낌이 없어진다"며 "밴드 연주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도 우리가 수십 년간 타왔던 장단의 흐름을 잃지 않으려 길을 찾는 과정이 가장 치열하고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보컬이 여럿이라는 밴드의 특성도 새로운 과제였다. 박수범은 "소리로만 봤을 때는 엄청난 힘을 실어야 할 것 같지만, 막상 곡 안에서는 느낌이 달라요. 판소리만 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양쪽의 음악을 다 이해하면서 그 중간 지점에서 완급 조절과 호흡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것이 보컬들의 숙제"라고 덧붙였다. 라서진 또한 "각자 개성이 강한 4명의 보컬이 함께 밸런스를 잡아가며 웅장한 에너지를 쌓아가는 과정 자체가 새롭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장영규는 이를 두고 "혼자 소리를 할 때와 달리, 4명의 보컬과 3명의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구조 안에서 각자가 어떤 역할을 찾고 해석해 내느냐의 문제"라고 정의했다. 전통 음악의 한 대목을 단순히 밴드 포맷으로 편곡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 곡의 본질적 구조부터 설계하고 각자의 호흡으로 채워나가는 이 치열한 방식이 곧 이날치만의 서사를 구축한다.

◆현대판 '산공부'가 된 월드투어…'K-인디'의 새 이정표를 세우다

이날치는 오는 6월 캐나다의 오타와, 몬트리올, 밴쿠버 등 주요 재즈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투어에 나선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스턴 그로브 페스티벌(Stern Grove Festival)'에서 한국계 미국 싱어송라이터 미셸 '정미' 자우너가 이끄는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와 협연하고, 로스앤젤레스(LA) 게티 센터(The Getty Center)'에서 단독 공연을 갖는 등 현지 주류 문화계의 중심부로 파고들 계획이다.

장영규를 필두로 안이호, 최수인, 오형석(드럼), 박수범, 라서진, 이재(베이스)로 구성된 이날치는 그간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 영상으로 6억 뷰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한국대중음악상을 휩쓰는 등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다. 지난해 11월 정규 앨범 '흥보가' 발표에 이어 이번 글로벌 싱글 '떴다 저 가마귀'로 'K-밴드'의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서울=뉴시스] 이날치 '떴다 저 가마귀(Here Comes That Crow)' 커버. (사진 = 하이크 제공) 2026.04.2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날치 멤버들은 해외 투어를 일종의 현대판 '산공부(판소리 명창들이 산속에 들어가 수련하는 것)'에 비유했다. 매일 비행기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내려 공연을 올리는 강행군 속에서, 이들은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서로의 호흡을 읽고 변주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내고 있다. 어린 시절 합주실에 선풍기도 없던 때 땀방울을 흘리며 음악의 원초적 재미를 느꼈던 소년 장영규의 기억은, 이제 후배들과 함께 밟는 이역만리 무대 위에서 거대한 시너지로 환생하고 있다.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이 오직 리듬 자체에 몸을 맡기는 해외 관객들의 순수한 에너지는 이날치에게 가장 확실한 자양분이다.

장영규는 "작년 투어 당시 매일 공연을 이어가면서 무대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을 우리 스스로 느꼈다"며 "다가올 새로운 월드투어에서도 작년보다 더 거대하고 밀도 높은 에너지가 응집될 것을 확신한다"고 설렘을 내비쳤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음악은 K-팝 아이돌 그룹의 거대한 성공에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이날치는 획일화된 수출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장영규는 "한국 음악이라고 하면 K-팝이 모든 자본과 인지도를 가져가고 있는 척박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작은 실마리들을 통해 계속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교를 넘어선 '태도'…사이키 팝(Psych Pop)이 된 '문화 컬렉티브'

이날치가 걷는 미답의 길은 특정한 장르적 기교가 아닌, 대상을 마주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장영규는 "우리는 어떤 특정한 장르나 다른 밴드를 롤모델로 삼는 것이 아니에요. 긴 시간 각자 다른 경험을 쌓아온 사람들이 모여, 지금 여기에서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것"이라며 "어디에도 없는 밴드가 생겨나는 이유는 각자의 다름을 지닌 채 함께 만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진정한 음악적 고유성이란, 음악의 외피를 넘어 타인과 세계를 대하는 가장 정직한 윤리적 태도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이날치는 아울러 수직적인 지시로 움직이는 기획형 밴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시간과 물성을 지닌 예술가들이 모여 유연하게 교감하고 논쟁하는 하나의 '문화 컬렉티브(Collective)'다. 박수범은 "서로 나이대가 다른데도 민주적이고 존중하는 태도 덕분에 편하게 임할 수 있어요. 늘 진지하게 탐구하시는 장영규 선생님의 태도 자체를 배우고 있다"고 존경을 표했다. 최수인 역시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고, 이해가 안 되면 가감 없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유연함이 이날치라는 음악을 할 수 있는 밴드 태도의 본질"이라고 거들었다.

이러한 밴드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꿰뚫어 본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다 건너의 레이블이었다. 루아카 밥 측은 이날치의 음악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얼터너티브 팝' 대신 '사이키 팝(Psych Pop)'이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장영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얼터너티브라는 단어보다, 사이키델릭 팝이야말로 그들이 들었을 때 이날치가 발산하는 에너지를 가장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라며 직접 명명해 줬다"고 밝혔다.

지시와 복종 대신, 끊임없는 기다림과 상호 존중으로 '다름'을 직조해 내는 이들의 태도야말로 이날치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K-팝의 눈부신 성공 이면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생태계가 얼마나 더 깊고 넓어질 수 있는지, 그 철학적이고도 육감적인 대답을 이날치가 지금 전 세계를 향해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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