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닥터신' 스타일리스트 김진주 역
서바이벌 오디션 거쳐 주연으로 발탁
"목소리 톤 바꾸려고 피날 때까지 연습해"
"제일 재미있는 건 연기, 자기 믿음은 원동력"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한 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영화 '세상의 아침'과 '미드나이트', 드라마 '의사요한', '모범형사', '악마판사' 등 굵직한 작품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최근에는 소속사를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혼자 촬영장을 다녀도 그렇게 힘들진 않아요. 물론 초반에는 용기가 많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여주는 것들이 다 즐거운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배우로서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고, 나중에는 진짜 값진 경험이 되더라고요. 덕분에 연기도 더 깊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배우로 살아온 지난 16년이 그러했듯 천영민은 부지런히 오디션을 보며 문을 두드렸다.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컸다. "저는 한번 생각하면 뒤를 생각하지 않아요. 제 선택을 믿는 편이에요.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과가 늘 좋을 순 없고, 생각보다 안 될 때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지만 제가 선택한 것에 있어서 후회하는 건 없어요.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것에 책임지는 거라고 봐요."
그렇게 오디션을 분주히 다녔던 천영민의 발걸음은 확실한 성과가 되어 돌아왔다. 드라마 '신이랑 법률사무소'에서 질투에 눈이 먼 아이돌 연습생 엠마, '닥터신'에서는 톱배우 모모의 스타일리스트 김진주를 연기해 눈도장을 찍었다. 특히 '닥터신'은 주연으로 발탁됐다. '보고 또 보고', '인어 아가씨', '하늘이시여' 등을 흥행시킨 임성한(필명 피비)작가의 신작이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천재 의사와 하루아침에 뇌가 망가져 영혼을 잃어가는 여자의 이야기로, 엄마와 딸의 뇌 교체라는 충격적인 소재로 첫 방송부터 이목을 끌었다.
'닥터신' 오디션 과정에 대해 묻자 천영민의 목소리에 미세한 속도감이 더해졌다. "오디션을 한 6시간 봤어요. 몇십 명이 오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추려내고 또 추려내고, 주인공을 맡을 사람이 남을 때까지 합을 맞춰보고, 카메라 테스트도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저희 다섯 명이 남았는데 작가님이 부르시더니 '너희가 주인공이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순간 '나 된 건가' 했어요. 어안이 벙벙하고 신기했어요." 임 작가의 선택을 받은 이는 천영민을 포함해 정이찬(신주신 역), 백서라(모모 역), 안우연(하용중 역), 주세빈(금바라 역).
촬영을 앞두고 다섯 배우의 연습이 시작됐다. 3개월 동안 매일 10시간씩 합을 맞췄다. 체력적으로 지칠 법하지만, 희열을 느낀 순간도 많았다. "배우들이 그룹 리딩을 하긴 하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모여서 연습하기는 힘들어요. 근데 1년 정도 작품을 쉬어서 그런지 연습하러 가는 길이 너무 좋았어요. 귀찮았던 적 없이 너무 감사했어요." 치열한 오디션을 함께 통과한 동료들은 추진력을 더해줬다. 배우의 삶에서 단단한 관계가 주는 힘을 다시 실감했는지 천영민은 "서로 너무 친해졌고, 의지를 많이 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또래 배우들과 교류한 현장은 즐거운 놀이터이자 자연스러운 배움터였다.
"저희 다섯 명 다 친해요. 바라를 연기한 세빈이는 저랑 동갑인데 제가 대학교 선배예요. 원래 알던 친구였고, 서라랑은 촬영장에서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그리고 이찬이랑도 붙는 장면이 많아서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다 같이 촬영하면 의지도 많이 하고, 서로 연기가 어땠는지 봐줬어요. 그 점이 큰 도움이 됐어요. 단톡방도 있는데 실시간으로 같이 보면서 얘기해요. '오늘 신 좋았다.진주야, 오늘 네 덕분에 드라마가 재미있었던 것 같다'고 하면 '지금은 조금 쳐지는 거 같은데' 이렇게 장난도 치고,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눠요."
천영민이 연기한 김진주는 복잡한 서사를 가진 캐릭터다.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라고, 우여곡절 끝에 톱배우 모모의 스타일리스트가 되지만, 매번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러다 모모가 불의의 사고로 의식불명에 빠지면서 진주는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모모의 연인이자 천재 의사 신주신에게 뇌 교체 수술을 받으면서 진주의 뇌는 모모의 몸에 이식된다. 이후 모모의 얼굴을 한 진주는 낯선 모습에 어색함을 느끼지만, 화려한 상류층의 삶을 꿈꾸며 숨겨왔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하기까지 천영민은 고민이 많았다. "처음 오디션을 볼 때만 해도 '이걸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게 이해가 갈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대본을 읽다보니 뇌 체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본성이나 감정이었어요. 작가님이 이걸 현실감 있게, 공감이 가게 써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닥터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빠르게 간파한 천영민은 진주를 자신만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진주가 마냥 그런 애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고민했던 것 같아요. 진주가 좀 못되게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입체적으로 봐주시더라고요."
진주로 완벽하게 변신하기 위해 목소리 톤도 바꾼 노력도 털어놨다. "원래 목소리가 저음인데, 작가님이 '진주의 목소리는 그렇게 낮으면 안 된다, 톤을 높여야 한다'고 정해놓으셨어요. 그런데 워낙 톤이 낮다 보니 별의별 시도를 다 해보고, 목에서 피가 날 때까지 연습했어요." 이러한 노력이 통한 걸까. 임 작가는 천영민의 촬영본을 보고 "기대 이상"이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흠잡을 게 없다는 식으로 말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작가님한테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올해 스물 아홉.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활동하며 시행착오도, 고민도 충분히 지나왔다. 연기에 대한 태도는 한결 진지해졌다.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스터디를 하고, 일정이 없는 날에는 모니터링을 하거나 연기 소양을 쌓기 위해 전시회를 찾는다. "요즘 확고한 취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취미도 이것저것 해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이번에 작품을 하고 나서 견문이 넓어야 연기의 폭도 넓어질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해 다음 작품도 꿈꾼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어디에 있을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들. 예를 들면 '나의 아저씨' 같은 이야기요. 그리고 제가 털털한 성격이 있어서 남장도 해보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천영민은 지난해 친구와 새해다짐을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재작년에 1년 동안 활동을 못 했어요. 오디션을 봐도 잘 안되고, 확신도 많이 없어졌던 시기죠. 그러다가 작년 초 친구랑 연기 훈련하면서 새해 다짐을 이야기 했어요. 저는 '매력적인 악역을 맡아서 사람들에게 내 매력을 알릴거야'라고 했는데 진짜 그 말대로 됐어요." 그러고 보니 연기를 대하는 태도만큼, 스스로에 대한 태도에서도 단단한 믿음이 느껴진다. "이 일을 하면서 '다른 거 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다행히 저는 청개구리 같은 면이 있어서 '안 할 건데. 이거 할 건데'라고 해요. 결국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어떤 환경이든 흔들리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역시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리고 어쩐지 천영민이 그 목표를 이룰 거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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