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끝날 수 없다”…RM이 꺼내고, 서울미술관이 살린 김상유

기사등록 2026/03/31 18:48:15

4월 1일 부터 역대급 회고전…150점 전시

'쉽게 닳지 않는 사람'…연대기별 판화·유화 한자리

서울미술관 김상유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렇게 끝날 수 없다.”

이 다짐은 50여 년 만에 다시 빛나고 있다. 세상에서 잊혀져가던 작가 김상유(1926~2002)가 다시 부활했다.

그를 대중의 시선 위로 끌어올린 계기는 의외로 미술계 바깥에서 시작됐다. 2022년 BTS RM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장 작품 ‘대산루’를 공개하면서다. 작가의 이름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다시 불렸다.
RM이 소장한 김상유 ‘대산루’ *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 최초로 동판화를 시도하며 현대 판화사의 지평을 연 김상유는 오랫동안 ‘은둔의 화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익숙한 수식을 뒤집는다.

서울미술관은 김상유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을 4월 1일부터 8월 17일까지 개최한다.

800평 규모 전시장에 15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며, 동판화·목판화·유화로 이어지는 반세기 작업 세계를 연대기적으로 조망한다. 이는 1990년 제2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 이후, 이듬해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기념전 이후 최대 규모로, 사실상 작가의 작업 세계를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서는 RM이 소장한 김상유의 대표작 ‘대산루’ 연작 2점도 출품된다. 절제된 미감과 단정한 조형 언어가 집약된 작업으로, 작가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미술관 김상유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미술관은 한국 판화의 선구자 김상유(1926~2002)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기자간담회를 31일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갖고 판화부터 유화에 이르는 작가의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3.31. pak7130@newsis.com


◆교사도 때려치고 판화가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시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교사로 살다 한 권의 미국 미술 잡지를 마주한다. 잊고 있던 꿈이 다시 타올랐다.

“이렇게 끝날 수 없다.” 그의 창작은 그날 다시 시작됐다.

수년간의 실험과 연구 끝에 1970년 제1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하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새겼다.

초기작 ‘막혀버린 출구’는 그의 예술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검은 화면 위에 남은 것은 몸이 아니라 시간이다.

같은 연작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희미하게 찍힌 판화는 거의 사라질 듯하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가장 연약한 매체 위에 남은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흔적이다.

사라진 존재를 끝내 지우지 않는 작업 속에서 그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해있는 모습.”

1970년 동아일보에 남은 이 문장은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다. 그의 인물은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다. 그저 그 사이에 머문다. 그래서 그는 끝내, 쉽게 닿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미술관은 한국 판화의 선구자 김상유(1926~2002)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기자간담회를 31일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갖고 판화부터 유화에 이르는 작가의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3.31. pak7130@newsis.com


시력이 약해진 이후 그는 목판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타협이 아니었다. 나무와 한지, 먹이라는 재료를 통해 오히려 더 깊이 한국적 조형 언어로 들어갔다.

목판을 수없이 문지르는 반복 노동 속에서 화면은 완성됐다. 그의 작업은 간편함과 거리가 멀다. 이미지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 과정에 쌓인 시간이다.

 전시장에는 국수기계를 개조해 만든 판화 프레스기가 놓여 있다. 도구를 구할 수 없던 시절, 그는 일상의 기계를 작업의 장치로 바꿨다. 부식 과정에서 발생한 가스는 그의 시력을 앗아갔지만, 예술에 대한 집념까지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의 판화에는 한국의 기물과 건축, 문자와 정서가 함께 새겨져 있다. 이러한 작업은 당시 특급호텔 내 화랑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판매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기념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미술관은 한국 판화의 선구자 김상유(1926~2002)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기자간담회를 31일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갖고 판화부터 유화에 이르는 작가의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3.31. pak7130@newsis.com


그의 작업은 ‘기교 없는 기교’로 수렴된다. 공들인 흔적을 지우고 형식을 덜어낸 자리에서 오히려 더 또렷한 미감이 드러난다.

사찰과 전통 건축을 그린 ‘대상로’ 연작은 그가 구축해온 한국적 조형 언어를 보여준다. 반복된 건축은 풍경이 아니라, 그가 붙들고 있던 세계의 구조다.

전시장에는 명상하는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머리는 점점 벗겨지지만 가부좌 자세만큼은 끝내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저이지요. 또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

그 인물은 작가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그의 그림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그린다.

전시 공간 역시 이를 반영한다. 한옥 문살 구조 속에 작품을 배치해 관람자는 그림을 ‘보는’ 대신 ‘들여다보게’ 된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미술관은 한국 판화의 선구자 김상유(1926~2002)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기자간담회를 31일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갖고 판화부터 유화에 이르는 작가의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3.31. pak7130@newsis.com


전시 후반부에 이르면 화면은 더욱 단순해진다.

“청산도 절로 절로 나도 절로 절로.”

자연도 인간도 억지 없이 존재한다는 이 문장은 그의 도착점이다. 더하지 않고 덜어내는 방식으로 완성된 세계다.

그는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그림을 그렸다. 자연에 더 가까이, 더 깊이 스며든 화면에는 반세기 동안 이어온 예술혼이 담겨 있다.

평생 그의 손에서 도구가 놓인 적은 없었다.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그는 끝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2002년, 향년 77세. 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그의 몸이 뿌려지며, 그는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아이프칠드런 이사장은 “김상유 작품의 진면목은 ‘기교 없는 기교의 멋’”이라며 “조용하고 단정한 화면 속에 안분지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 유니온약품그룹 회장이 31일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판화의 선구자 김상유(1926~2002)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기자간담회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6.00.31. pak7130@newsis.com


◆김상유를 다시 올린 컬렉터의 집념
이번 전시는 서울미술관 안병광 회장의 측은지심 컬렉팅에서 출발했다.

그는 200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김상유 전시를 찾았다.  “당시 관람객이 저 혼자였습니다. 참 외롭고 쓸쓸한 전시였어요.”

그는 그 자리에서 전시된 작품을 거의 모두 사들였다. 약 100점에 이르는 규모였다.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남들이 관심 두지 않는 작가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습니다.”

생전 300여 점 남짓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김상유의 주요 작품 상당수를 소장하게 된 그는 “김상유 작가의 삶을 통째로 내가 받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안 회장은 “김상유는 충분히 평가받아야 할 작가였다”며 “이번 전시가 그의 작업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이 31일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판화의 선구자 김상유(1926~2002)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기자간담회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6.00.31. pak7130@newsis.com


전시를 기획한 안진우 이사장은 “이번 전시는 스타 작가 중심으로 좁혀진 미술계 구조에 질문을 던지는 기획”이라며 “김상유의 삶과 예술 세계를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깊이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김상유의 작업 세계와 함께, 그 세계를 지켜온 세 명의 후견인 김용원·박주환·이우복을 함께 조명한다. 이들은 대한민국 1세대 컬렉터이자 미술애호가로, 작가의 창작을 가까이에서 지지하며 재정적·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왔다.

이들의 헌신과 신뢰 속에서 김상유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작가와 후견인의 관계를 통해, 한 작가의 성취가 개인의 재능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한 구조 속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전시기획팀 김현주 팀장이 김상유 작가를 지키고 후원한 3명의 후견인 김용원·박주환·이우복을 소개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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