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성폭행의 기억을 잊기 위해 자신의 피로 일기를 쓰는 소년, 상담실에서 장난감 칼로 클레이 인형을 난도질한 4살 성폭행 피해 아동, "태어나서 미안해요"라며 첫마디를 꺼낸 함구증 아이, 갑작스레 친구를 잃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채 자책하는 아이.
신간 '어떤 아이들은 상처로 말한다'(멀리깊이 출판사)는 대만의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 셰이팅이 쓴 청소년 자해와 문제행동에 대한 임상 르포다.
셰이팅은 대만에 300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 중 한 명으로, 책을 통해 옹알이 단계의 영아에서 20대에 접어든 청소년까지 소아청소년 전 연령대가 겪고 있는 다양한 심리적 고통과 자해의 실태를 생생히 기록했다.
26개의 사례 속에는 상처를 내는 아이들의 절박한 마음과 그 곁을 지키려는 어른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 2020년 출간돼 대만의 다양한 전문가와 부모들에게 지지를 받은 이 책은 2025년 한국의 교실과 가정에서도 마주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2021년부터 2025년 6월까지 전국 학교에서 자살시도·자해를 한 전체 학생 수는 3만1811명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아이가 '죽고 싶어 했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더 우려스러운건 가파른 증가폭이다. 2022년 522명이던 자살시도·자해 학생 수는 2023년 844명, 2024년 968명으로 늘어 올 상반기에만 589명의 아이들이 자살을 시도했다. 정부가 지난 9월 10년 안에 자살률을 40% 낮추겠다는 '국가자살예방전략'을 발표했지만, 현실은 그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 작가는 "입시가 치열한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고 있으며 주변 아이들은 성적이 인생과 직결된다고 믿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병원은 세상과 불화하는 아이들로 넘쳐나고, 가끔은 안타까운 사연도 접하게 된다고.
그러나 이 책의 취지는 분명하다. 문제가 있으니 덮지 말자는 것이다.
만연한 성폭력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고, 청소년의 약 10%가 겪는 성정체성 혼란 역시 사회 전체가 '없는 수치'처럼 외면하고 있지만, 저자는 그 침묵을 깨고 아이들의 신호를 정면에서 듣자고 제안한다. 또한 청소년 자해 및 우울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하게 하며, '공부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구는 사회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료실에 둘만 남자, 열대어 소년이 재빨리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를 펼치자마자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한 줄 한 줄 붉은색으로 써 내려간 글은 뭔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중략) 아이는 대답 없이 소매를 걷어 상처로 빼곡한 팔을 보여주었다. 일기를 무엇으로 썼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1쪽, '그들 중 누구도 소년이 성폭행 당하는 걸 보지 못했다' 중 )
"내면의 혼란을 스스로 해결할 힘이 약한 아이는 흔히 신경질적으로 굴며 타인과 자신을 상처 입힌다. 만약 이때 아이의 구조 신호를 무시하고 다그치기만 한다면 도와줄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다." (8쪽, 선야치 교사 겸 특수반 학부모의 '추천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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