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와 세운상가의 '질긴 악연'…십수년째 개발·보존 충돌

기사등록 2025/11/10 09:53:38 최종수정 2025/11/10 10:08:27

피란민 판자촌 있던 종삼, 재개발로 세운상가 건립

1995년 종묘 세계유산 등재 후 세운상가 철거 계획

2009년 시작된 종묘 문화재 심의로 철거 계획 무산

사업 중단으로 서울시 2000억원 손해…주민도 피해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서울시의회가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과 협의 없이 문화재 인근 개발 규제를 완화한 서울시 조례를 개정한 것은 적법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이번 대법원의 판단으로 최근 142m 규모의 초고층 빌딩을 세울 수 있도록 상향 조정한 서울시의 종로구 종묘 인근 세운4구역 재정비 사업 계획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사진은 6일 서울 종로구 종묘와 세운4구역 모습. 2025.11.06. xconfind@newsis.com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세운4구역 재개발을 둘러싸고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정면충돌하고 있다. 종묘 경관을 지켜야 한다는 문체부와 도시 정비가 필요하다는 서울시가 대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종묘와 세운상가를 둘러싼 개발 논란의 기원을 찾자면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태평양 전쟁 때 국내 도시들이 폭격으로 파괴되는 것을 경험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서울에서도 폭격과 화재에 대비했다. 조선총독부는 종로와 을지로 일대 건물들을 철거하고 길이 760m, 폭 50m 소개공지(疏開空地)를 만들었다.

광복 이후 6·25 전쟁을 치르면서 종묘 앞과 이 일대를 피란민들이 점거했다.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과 홍등가가 들어섰다. 이 구역은 종삼(鍾三)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6·25 전쟁 후 피폐했던 도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967년 국내 최초 재개발 사업인 세운상가 건설이 추진됐다. 이를 통해 홍등가와 판자촌이 철거됐다.

종묘 앞 종로3가에 접한 곳에는 유명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한국 최초 주상 복합형 건물인 세운상가가 들어섰다. 1967년에 건립된 세운상가와 현대상가를 시작으로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가 잇달아 건립되면서 세운상가군이 형성됐다.

세운상가와 그 일대는 1970년대 전기·전자 등 도심 산업 메카로 성장하며 서울의 명물로 자리매김했지만 이후 강남 개발로 상권이 이동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95년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면서 세운상가는 큰 위기를 겪게 됐다. 같은 해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세운상가군을 철거하고 주변 지역을 통합 개발하려는 시도가 구체화됐다.

2004년 도시·건축 통합 국제 현상 설계를 통해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울시는 1단계 사업 구간에 포함된 상인들을 임시 영업 시설로 이주시켰으며 2008년 12월에 종묘에서 가장 가까운 현대상가를 철거했다.

2009 세운지구 재정비 촉진계획에는 세운상가군을 모두 철거하고 전체 대상지를 8개 대규모 구역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이 담겼다. 종묘와 마주 보고 있는 세운4구역은 사업 승인 접수까지 마쳤다.
[서울=뉴시스] 전진환 기자= 40여년의 역사를 가진 국내 전자산업의 대명사로 불리는 세운상가가 '세운녹지축조성사업' 으로 녹지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서울시는 1단계로 현대상가 철거를 시작으로 내년 4월까지 전체면적 3,000㎡의 녹지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며, 세운 및 청계, 대림상가를 대상으로 한 2단계, 삼풍과 풍진상가 일대의 3단계 녹지축 사업을 2015년까지 끝마칠 계획이다. amin2@newsis.com
2009년 7월 시작된 종묘 문화재 심의는 이 사업을 무산시켰다. 문화재 심의 위원들은 용적률 850% 이하, 최고 높이 122.3m의 계획안을 접한 뒤 '종묘에서 바라보는 외부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건축물 높이를 낮추라고 권고했다.

문화재청은 종묘 정전에서 바라볼 때 건축물 최상층이 3개 층 이하로 보이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종묘 맞은편에 위치한 세운4구역 건축물 높이가 122.3m에서 50여m로 하향 조정됐다.

낮아진 건물 높이 탓에 서울시는 사업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재개발을 추진하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 시장직에서 사퇴하고 박원순 시장이 보궐선거로 입성했다. 박 시장과 서울시는 2012년에 세운상가군 철거 계획을 백지화했다.

문화재청의 심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에 대한 문화재 심의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세운상가 일대 전역을 대상으로 지속됐다.

문화재 심의로 인해 개발이 이뤄지지 않자 재개발 시행사인 SH공사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매달 약 6억8000만원을 지출했다. 알려진 손해액이 약 2000억원에 달했다. 시공사뿐 아니라 세운상가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상인들 역시 피해를 입었다.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는 세운상가군을 존치하고 그 일대를 창조 문화 산업 중심지로 변경시키겠다며 2014년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추진된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상가를 연결하는 공중 보행로, 각종 거점 시설이 들어섰다.

박 시장과 서울시는 2020년 도시 재생 사업을 한층 구체화했다. 세운상가 일대에 공공 임대 상가, 산업 특화 골목, 산업 재생 거점, 주민 공동 시설, 교육 시설, 도시형 소공인 집적 지구, 소공인 특화 지원 센터, 마이스터 스쿨 등을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발표 후 4개월 뒤 박 시장이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추진되지 못했다.

박 시장 사망 이후 2021년 서울시장으로 복귀한 오세훈 시장은 세운상가 철거를 재천명했다. 그는 2021년 11월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 종로2가와 청계천을 보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며 박 전 시장이 추진한 세운상가 재생 사업에 큰 불만을 표출했다. 공중 보행로에 대해서는 "개발을 가로막는 대못"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나아가 오 시장은 2023년 4월 세운상가를 직접 찾아 '녹지생태도심 재창조 전략'을 발표했다. 세운상가군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녹지 공원을 조성하는 대신 주변 지역 빌딩 건축 때 용적률을 높여주겠다는 옛 구상이 다시 제시됐다.

더불어민주당에 10여년간 밀려 있다가 다수당 지위를 되찾은 국민의힘이 오 시장을 뒷받침했다. 서울시의회 김규남 의원(국민의힘·송파1)이 역사 문화 환경 보존 지역 인근 주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건축 규제를 완화한다는 내용의 '서울특별시 문화재보호조례 개정안'을 발의했고 이 조례안은 2023년 9월 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문체부와 문화재청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문체부는 조례 개정 과정에서 문화재청과 협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며 조례 개정을 무효화해 달라고 대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 선고를 1주일 남긴 시점에 서울시가 승부수를 던졌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세운4구역의 건물 높이 기준을 기존 '종로변 55m, 청계천변 71.9m'에서 '종로변 101m, 청계천변 145m'로 완화하는 내용으로 재정비촉진계획 변경 고시를 했다. 종묘 인근에 최고 높이 145m에 이르는 고층 건물을 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서울시 고시에 대법원이 화답한 형국이 됐다.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지난 6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제기한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 조례 중 개정조례안 의결 무효확인' 소송 선고 선고기일을 열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대법원은 "서울시가 조례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의결하면서 당시 문화재청장과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해도 법령 우위 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서울시의회와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판결에 위기감을 느낀 문체부와 문화재청은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위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며 서울시를 재차 압박했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지난 7일 서울 종묘 정전에서 허민 국가유산청장과 기자회견을 갖고 "권한을 조금 가졌다고 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는 서울시의 발상과 입장을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며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이 계속해서 이런 취급을 당해야 되겠나. 조선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자 세계문화유산인 이곳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이것 밖에 안 되나"라고 따졌다.

허 문화재청장도 "대체 불가한 종묘가 지금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다"며 "종묘 앞에 세워질 높은 빌딩은 서울 내 조선왕실 유산들이 수백년간 유지해온 역사문화경관과 종합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고 짚었다.

기자회견 현장에는 세운4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 주민대표회의 관계자 10여명이 항의 방문했다. 이들은 "국가유산청장은 손해배상하라", "국가유산청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라" 등 팻말을 들고 최 장관과 허 청장에 항의했다.

종묘 기자회견에 대응하는 세운상가 기자회견이 열렸다. 오 시장은 최 장관과 허 청장 기자회견이 열리고 불과 몇 시간 뒤 세운상가 옥상에 올라가 문체부와 문화재청을 향해 반박을 내놨다.

오 시장은 종묘 일대가 심하게 낡아 있다며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세운 지구를 비롯한 종묘 일대는 서울의 중심임에도 오랫동안 낙후된 채 방치돼 말 그대로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라며 "1960년대를 연상시키는 세운상가 일대 붕괴 직전의 판자 지붕 건물들을 한 번이라도 내려다본 분들은 이것이 수도 서울의 모습이 맞는지, 종묘라는 문화유산과 어울리는지 안타까워하신다"고 언급했다.

오 시장이 문체부, 문화재청과 협의를 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긴 가운데 세운4구역 높이 조정 등 대안이 마련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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