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안전 위협받은 경험 되살린 '12·3 비상계엄'
"분열 경계하고 서로가 서로 안정 기여해야"
[서울=뉴시스]임철휘 기자 = "너무 화가 나서 공부도 안 되고 계속 뉴스를 확인하게 돼요. 감정이 진정이 안 돼서 예전에 처방받았던 진정제도 꺼내 먹었어요."
이번 주말 취업 면접을 앞둔 이은지(29·여)씨는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 3일 이후 줄곧 분노와 무기력에 휩싸여 있다며 말했다. 이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면접 준비를 하는 데에 죄책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로 분노·우울·무기력 등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는 시민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과거 개인이 안전을 위협받은 기억을 되살려 자극한 측면이 있다며 이를 '집단 트라우마'로 이해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직장인 남모(27·여)씨도 최근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어젯밤 모기 소리가 들려서 잡으려고 불을 켰는데, 알고 보니 이명이었다"며 "최근 은은한 우울과 심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안 좋은 감정에 압도될까 봐 생각하지 않으려다 보니 오히려 쌓인 감정이 불면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호소했다.
이런 현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전날 광화문에서 만난 택시기사 문모(67·남)씨는 "생중계로 (3일 비상계엄 선포를) 보면서 충격받았다. 장발이라고 잡아가거나, 길에 서 있는 경찰만 봐도 무서워했던 거, 차 안에서도 함부로 나라 욕을 못 했던 게 다 떠올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산에 거주하는 나연희(66·여)씨도 "TV로 군인들이 모인 걸 보면서 겁이 났다"며 "요즘엔 잠도 잘 안 와서 밤에 유튜브로 뉴스를 찾아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이랑 모이기만 해도 누가 잘하고 잘 못하고를 떠나서 다 같은 마음으로 나라 걱정을 한다"고 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조직에 대한 회의감이 번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일선의 한 경찰관은 "경찰은 상명하복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엔 '이건 아니다' 싶었다"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명령도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번에 절감했다는 직원(경찰)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경찰관은 "왜 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시키는 대로 했는데, 위에서는 이유를 설명 안 해줄 때 현장 경찰관들은 회의감을 많이 느낀다"며 "이번에도 기동대에 있는 동기가 사람들이 '막는 법적 근거가 뭐냐'고 물어봤는데 대답할 수 없어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고 전했다.
계엄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는 취지의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윤석열 내란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 준비모임'은 지난 10일 윤 대통령을 상대로 정신적 손해에 따른 위자료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이런 현상을 집단 트라우마 증상이라고 진단했다.
심민영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안전에 위협받는 경험을 하면 개인이 갖고 있던 과거의 위협받았던 경험, 불안 등이 다시 활성화된다"며 "실제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들이 요즘 다들 힘들어한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심 센터장은 집단 트라우마는 정체성이 위협받아 생기는 문제라며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사회의 유대감, 자긍심, 정체성을 망가뜨리고 결국 '분열'을 일으킨다"며 "생각이 자신과 다르다고 서로 비난하는 행태는 트라우마 회복의 관점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민들이 서로의 심리적·물리적 안정에 기여하는 게 회복에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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