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도입…3000만원 넘는 주식 의무 매각
매각 피하려면 '직무 관련성 없음' 결정 필요
황철주 등 공직 포기 사례…재산권 침해 비판
문 구청장은 지난 15일 사퇴문에서 "최근 법원에서는 제가 주주로 있었던 기업과 구청장의 직무 사이에 업무 연관성이 있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며 "이 같은 법원의 결정은 그간 사심 없이 공명정대하게 구정을 수행해 온 저로서는 매우 아쉽고 가슴 아픈 결정"이라고 밝혔다.
문 구청장은 16일 구로구의회 의장에게 사임통지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2022년 7월 민선 8기 지방선거에서 당선돼 취임한 지 2년3개월 만이다. 구로구는 오는 17일부터 엄의식 부구청장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된다. 새 구청장을 뽑을 보궐선거는 내년 4월 치러질 예정이다.
이번 사태는 지난해 3월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백지신탁위) 결정에서 비롯됐다. 2022년 구로구청장에 당선된 문 구청장은 이듬해 3월 백지신탁위에서 주식회사 문엔지니어링 주식이 구청장 직무와 관련성이 있다는 결정 처분을 받았다. 문엔지니어링은 문 구청장이 1990년 G밸리에 설립해 운영해온 정보통신기술(ICT) 엔지니어링 업체다.
백지신탁위는 해당 주식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하라고 문 구청장에게 요구했다. 문 구청장이 보유한 주식은 4만8000주로 평가액은 170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문 구청장은 1심과 2심 모두 패소했다.
문 구청장은 소송 과정에서 "회사가 관내 사업자가 발주하는 사업 수주를 금지하는 것으로 정관을 변경했고 본점을 구로구에서 금천구로 이전했으므로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원고는 구청장 지위에서 행하는 엔지니어링 사업에 관한 업무를 통해 회사의 경영 또는 재산상 권리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에 따라 주식을 팔아버리거나 백지신탁해야 할 처지가 되자 문 구청장은 미련 없이 구청장직을 내려놨다.
'주식백지신탁'은 2005년 도입된 제도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당시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지명자의 주식 스톡옵션 논란이 이 제도의 산파 역할을 했다.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진 장관은 삼성전자에서 받은 70억원 가량 스톡옵션을 행사하면 1000억여원을 벌어들이는 상황이었다. 직무 관련성 논란 끝에 그는 스톡옵션 행사를 포기하고 장관직을 택했다.
진 장관 논란을 계기로 이듬해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여야 모두 주식백지신탁 제도 도입을 공약했고 2005년 주식백지신탁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공직자윤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주식백지신탁의 취지는 공직자가 직위 또는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 주식 거래를 하거나 주가에 영향을 미쳐 재산을 증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산공개 대상자인 고위 공직자 본인이나 그 이해관계자(배우자 등)가 보유한 주식의 총 가액이 3000만원을 넘을 경우 2개월 안에 주식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을 해야 한다.
주식백지신탁 대상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무위원, 국회의원, 국가정보원장, 지자체장, 지방의회 의원, 고법 부장판사급 이상 법관과 대검 검사급 이상 검사, 중장 이상 장성급 장교, 대학 총장, 시도 교육감, 공기업 사장 등이다.
이들로부터 백지신탁을 받은 수탁 기관은 60일 이내에 해당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
문 구청장처럼 자기가 보유한 주식이 직무와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돼 매각 또는 백지신탁 의무를 면제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백지신탁위에 직무 관련성 심사를 청구해야 한다.
'직무 관련성 없음' 결정이 날 경우 해당 주식을 그대로 보유하거나 추가로 매입 또는 매각할 수 있지만 직무 관련성 있음 결정이 나면 2개월 이내에 해당 주식을 매각 또는 백지신탁해야 한다.
보유 주식과 관련한 직무에 관여하거나 이해 충돌 직무 관여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도 2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이 같은 주식백지신탁 제도에 반발했던 공직자들은 문 구청장 외에도 많았다.
배영식 전 새누리당 의원은 2010년 본인·가족의 주식을 처분하라는 백지신탁위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유병호 감사원 감사위원은 배우자가 보유한 8억원대 바이오회사 주식을 처분하라는 정부 결정이 재산권 침해라며 소송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박성근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배우자가 사내이사로 있는 서희건설의 수십억원대 주식을 백지신탁하라는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벌였지만 각하됐다.
고위 공직자들이 주식백지신탁 불복 소송을 시간 끌기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있다. 소송을 제기하며 백지신탁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끈 뒤 임기를 마무리해버리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주식백지신탁 제도가 유능한 인재의 공직 진입을 막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박근혜 정부의 첫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됐던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는 주식백지신탁 문제로 내정 사흘 만에 공직을 포기했다.
반도체 전공정 장비를 생산하는 주성엔지니어링 대표이사이자 벤처기업협회 회장을 역임한 황 대표는 당시 "설령 회사를 정리하려고 해도 최소한 주식을 제대로 처분하는 방법과 충분한 시간은 주어져야 하는데 기업을 책임지는 경영자 입장에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법과 제도"라며, "젊음을 바쳐 자식같이 키워온 기업을 1개월이라는 법적 시한에 매여서 내팽개치듯 아무에게나 처분할 수는 없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재산권 침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백지신탁을 한 경우 해당 공직자는 재산 처리 과정에서 배제된다. 구체적인 투자 선호나 투자 제한 관련 권한을 박탈 당하는 측면이 있다.
나아가 주식시장이 침체돼 주식 가격이 하락했을 때도 이를 강제로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사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아울러 주식 보유가 기업 경영권 확보와 연계돼 있는 경우에는 주식 매각이 경영권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단순히 회사 지분을 처분한다는 차원을 넘어 더 중대한 재산상 손해를 초래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주식백지신탁 제도가 연좌제 금지 원칙 위배, 공무담임권 침해 등 위헌 요소를 갖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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