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진료 약화 등 응급실 진료역량 반토막"
"지역 응급실 근무 의사 급감…위기감 고조"
"대부분 대학병원 야간 소아환자 수용 불가"
"단기 권역별 헤쳐모여 재정비 필요할 수도"
"의정 신뢰회복부터…이대론 모두 패자될 것"
15일 정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보통 추석 연휴에는 평소 보다 교통사고 환자와 화상 환자가 각각 1.5배, 3배 가량 늘어나 응급실에 과부하가 걸린다. 이번 추석 연휴의 경우 전공의들이 의료 현장을 대거 떠난 상황이여서 응급실의 환자 수용 역량이 더욱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이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반대해 병원을 떠난 후 빈 자리를 메워온 전문의(교수)들도 사태 장기화에 따른 번아웃(소진)으로 잇따라 사직 또는 휴직해 의료 현장에선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가 지난 9~10일 전공의가 근무했던 수련병원(대학병원) 53곳을 대상으로 응급실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급실 근무 의사 수는 922명에서 534명으로 388명(42.1%) 감소했다. 전의교협 관계자는 "1인 근무, 배후 진료 약화 등을 감안하면 실제 응급실의 진료 역량은 지난해 보다 50% 이상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문의마저 감소한 병원은 29곳(54.7%)에 달했다. 전공의(일반의)는 384명에서 33명으로 91.4% 급감했다. 특히 병원 21곳(39.6%)은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 수가 지난해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에 따라 병원 53곳 중 7곳(13.2%)은 의사가 5명 이하로 부분적 폐쇄를 고려해야 하는 수준이었고, 10곳은 의사가 6~7명으로 의사 1명이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공의 공백으로 외과, 소아청소년과, 내과 등 현장에 남아 있는 배후 진료과 의사의 진료량이 폭증하면서 응급실의 환자 수용은 더 어려워졌다. 응급실은 응급의학과의 1차적인 검사나 응급 처치에 이어 배후 진료과의 수술·입원 등 최종 치료가 불가능하면 환자를 수용할 수 없다.
환자 수용 능력이 급감하면서 현장의 의사들은 우울, 불안, 무기력감 등을 호소하고 있다. 서울의 주요 대학병원 A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에서 사망할 지경의 중환자 3~4명을 홀로 감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119로부터 수용 가능 여부를 묻는 전화를 하루에 수 차례 받고, 현장에서 지친 119 대원이 수용 불가 이유를 따져 묻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게 됐다"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은 고된 반면 보상은 적어 만성적인 인력 부족 속에서 근근히 유지돼온 소아 응급실을 지키는 의료진의 근심도 커지고 있다. 소아는 성인에 비해 진료에 투입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2~3배 이상 필요하지만 수가는 낮고, 자칫 의료 사고라도 발생하면 기대여명(앞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기간)이 길어 손해 배상금이 수억 원에 달해 소아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씨가 마른 상태다. 이런 가운데 사태 장기화로 전문의들의 사직도 늘면서 소아응급의료체계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
소아정형외과·소아흉부외과·소아신경외과 등 배후 진료과 과부하로 대부분의 대학병원 응급실은 야간에 소아 환자 수용이 불가한 상태다. 최근 일부 병원에서 시작된 소아 응급실의 365일 24시간 운영 중단이 확산할 위기에 놓였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B 소아응급의학과 교수는 "소아 환자의 배후 진료가 어려워 응급실이 열려 있어도 환자를 받을 수 없어 수용 불가 상황이 연달아 터지거나 입원이 안 되는 상황이 계속 될 것"이라면서 "추석 연휴가 많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응급 환자 수용 역량 급감으로 응급실에서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사태 장기화로 지역의 응급의료체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지방의 응급실 근무 의사가 크게 줄었고, 특히 부산의 응급실 근무 환경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의교협이 조사한 지역별 응급실 의사 감소 현황을 보면 충청, 부산, 광주·전남 지역은 50% 이상, 강원·전북, 대구·경북, 울산·경남 지역이 40% 이상 감소했다.
전의교협은 "의대 증원이 중단되고 전공의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면서 "추석 이후에도 현재의 아슬아슬한 상태가 지속되면 응급실 진료가 더 축소될 수도 있어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B 교수는 "물이 상류에 충분해야 하류로 흐를 수 있듯 소아응급의학과 전문의를 늘리려면 소아청소년과와 응급의학과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면서 "또 배후 진료 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아도 응급실에서 환자를 수용해 최선을 다해 치료한 후 상황실에 연락하면 최종 치료 결과에 대해서는 면책을 해주는 사법 리스크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응급실 근무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24시간 응급 환자를 수용하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의료계 일각에선 권역별로 병원을 지정해 응급의학과 전문의와 배후 진료 인력을 몰아주고 응급 환자들을 해당 병원으로 안내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B 교수는 "단기적으로 '권역별 헤쳐모여' 재정비가 필요할 수는 있다"면서 "응급실을 권역응급의료센터 위주로 운영하고, 소아 응급실 같은 경우 전문센터나 지역소아전담응급기관, 어린이 병원이 있는 병원 위주로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7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사태의 이면에는 의료계와 정부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어 신뢰 회복이 선행돼야 한다는 쓴소리도 나오고 있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혈액종양내과 명예교수는 지난 12일 페이스북을 통해 "의료 현장에서 의료진과 환자 간 신뢰가 특히 중요한데, 이번 사태의 이면에도 신뢰의 문제가 있다"면서 "대통령이 의사 집단을 '카르텔'로 규정한 이후 행정 관료와 정치인들 또한 의료계를 이겨야 할 적으로 여기는 상황에서는 협상이나 타협이 논의조차 되기 어렵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의료는 의사를 포함한 국민 모두의 문제"라면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호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작은 말 한마디, 의사 결정 하나하나가 신뢰를 쌓아가는 초석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갈등을 부추기고 싸움을 조장하는 방식으로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고, 이대로는 결국 우리 모두 패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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