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행진 속 '극심한 성장통'
멀티 레이블…k팝식 왜곡 경계
포토카드·밀어내기 등 K팝 관행 고쳐야
그룹 '뉴진스(NewJeans)'가 속한 어도어(ADOR) 민희진 대표, 방시혁 의장을 비롯한 하이브(HYBE)가 정면충돌하면서 민낯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 영역이 포함된 플랫폼 회사로 자산 5조 원 규모의 하이브가 대기업 지정을 앞두고 있는 등 K팝이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갖고 있던 고질적 문제들이 노출된 건데, 이번 기회에 뜯어 고치고 나가야 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물론 해당 사태는 이번에 '격정 기자회견'을 통해 '괴짜 크리에이터'로 대중에 인식된 민 대표와 거대 엔터 기업 하이브의 감정적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 측이 부딪히는 곳곳엔 K팝의 병폐가 똬리를 틀고 있다. 기업의 성장과 수익 창출이 우선이다 보니, 세밀한 부분까지 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K팝이 완전히 산업화되지 않았다 보니, 미숙한 부분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K팝 신(scene)엔 제왕적 리더십이 통하던 때는 구조적인 문제가 밖으로 노출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한때 3대 기획사로 통한 SM·YG·JYP엔터테인먼트가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고, 이들의 위상을 이긴 하이브가 엔터업계 최초로 코스피 시장에 상장한 상황이다. 주주를 비롯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어 작은 균열도 쉽게 넘어가기 힘들게 됐다.
게다가 이번 하이브 사태는 얽힌 실타래가 참 복잡하다. 고대 그리스에 등장하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얽히고설켰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탁 끊어 해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난맥상이다.
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는 이번 하이브 사태에 대해 "아이돌을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아이돌 제작 및 홍보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 계기"라면서 "더불어 경영권 분쟁 및 경업금지 등 복잡한 사안이 많이 얽혀 있어 K팝 신의 고민이 깊어지리라 전망한다"고 했다.
◆민희진·하이브 왜 갈등 빚게 됐나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양 측이 지향하는 방향성의 차이다. 시각 디자이너로 출발해 비주얼 디렉터를 거친 민 대표는 이전 대형 K팝 기획사 수장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리더다.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민희진 같은 새 유형의 리더는 시각적 충격과 모호한 바이브로 '경제적 확장'보다는 '감각의 제국'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치관과 가치관, 세계와 세계의 충돌이라고 봐야 한다"고 짚었다.
물론 경영권 찬탈 갑론을박, 경업금지를 포함한 주주간계약과 풋옵션 행사 금액·시기 이견 등 돈 문제도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서로의 가치관에 대한 몰이해, 상대방에 대한 존중 부족이 이번 사태를 낳은 출발점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멀티 레이블,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선 필수…K팝 업계식 왜곡은 경계해야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이번 사태의 촉발점 중 하나가 '멀티 레이블'이다. 멀티 레이블은 쉽게 말해 한 지붕 아래 여러 가족이 함께 사는 형식이다. 멀티 레이블, 특히 상장사의 멀티 레이블의 최대 강점은 양산한 다량의 콘텐츠로 사업의 다각화를 시도할 수 있다. 이렇게 매출 규모가 커지면 주가 상승도 탄력을 받게 된다.
세계 음반 시장 1위 나라인 미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시스템이다. 이른바 세계 3대 음반사가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유니버설 뮤직 그룹(UMG),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워너 뮤직 그룹이다. 각각 수많은 레이블들을 거느리면서 전 세계 음악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이브는 작년 SM 인수를 시도할 당시 들었던 인수 근거가 이들과 세계 시장에 맞서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국 빌보드가 유니버설뮤직·소니뮤직·워너뮤직을 제외하고 세계 음악시장에서 독자적 성과를 낸 레이블과 유통사 리더를 선정하는 타이틀이 '인디 파워 플레이어스'다. 세 음반 그룹사를 제외하면 더 인디로 통하는 셈이다.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K팝 기획사에게 멀티레이블은 필수 요건이긴 한다.
2021년 설립된 어도어는 하이브가 인수 형태로 편입한 것이 아닌, 자체적으로 처음 세운 레이블이다. 하지만 하이브 내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이었다. 2022년 5월 쏘스뮤직에서 걸그룹 르세라핌이 론칭하고 같은 해 7월 뉴진스가 데뷔하면서 경쟁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같은 회사에서 색깔이 다르더라도 2개월 차이를 두고 신인 그룹이 데뷔하는 건 이례적이다.
결국 쏘스뮤직과 어도어는 각각 르세라핌과 뉴진스를 앞세워 실적·성과 경쟁을 하게 됐다. 물론 표면적으로 '선의의 경쟁'처럼 보이는 구도가 두 회사의 성장엔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하이브의 지원사격 여부 등을 놓고 사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빌리프랩 소속 그룹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다는 민 대표의 판단이 뇌관이 됐다. 아일릿 데뷔는 르세라핌·뉴진스 데뷔 이후 불과 2년 만의 일이다.
임 평론가는 "멀티레이블은 다채로운 색이 공존하는 팔레트가 돼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곧 파이를 키울 뿐 아니라 리스크도 줄이는 방안이 된다"면서 "작금의 사태에서 드러났듯, 현재 하이브 스타일의 멀티레이블은 팔레트가 아니라 합숙소 같다. 한솥밥 먹고 같은 작업장으로 출근해 식구끼리 서로 밀치며 경쟁하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김도헌 평론가는 "하이브는 짧은 기간 빠른 성장을 거두며 다양한 레이블을 인수합병하는 형태로 현재 대중음악의 지배적인 기업 구조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창작의 자율권을 보장했다. 실제로 (세븐틴이 속한) 플레디스의 경우 팬들의 우려와 달리 자율성을 보장받으며 하이브 체제 하에서 크게 성장했다"고 봤다. 다만 "이번 사태에서 드러났듯 멀티 레이블 체제를 운영하며 레이블 간의 갈등을 조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등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의 미숙함이 드러난 것도 사실"이라고 짚었다.
◆포토카드·밀어내기 등 K팝 관행 고쳐야
민 대표가 "업계에서 랜덤 (포토) 카드 만드는 거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 또 (뉴진스는) '밀어내기' 안 하고 이 성적이 나왔다. '밀어내기' 한 애들이랑 경쟁하면서. 밀어내기 알음알음 다들 하고 있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랜덤 포토카드와 K팝 업계에 전반에 퍼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밀어내기는 북미에서도 지적하는, K팝 시장을 교란시킬 수 있는 상술과 긴밀히 유착돼 있다.
'랜덤 포토카드'는 앨범 판매량을 부채질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다. K팝 팬덤 시장은 '자신의 최애'를 띄워주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최애 포토카드가 어떤 음반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자신이 원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뽑기 위한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앨범을 다량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다. 노래는 스트리밍으로 들으니, 포토카드만 빼내고 앨범은 버리는 경우도 상당수다. K팝 기후행동 공동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Kpop4planet)' 등에서 랜덤 포토카드를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이유다.
밀어내기는 K팝 그룹의 인기와 팬덤을 확인케 하는 수치 중 하나인 초동(앨범 발매 후 일주일 간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꼼수로 통한다. 기획사와 음반 유통사가 앨범 발매 초창기 판매상에게 일부 음반 물량을 떠넘겨 구매하게 하는 방식이다. 대신 판매상이 해당 음반을 판매할 수 있게 기획사는 그룹의 팬사인회, 영상통화 이벤트 등을 열어준다. 이 과정에서 멤버들은 음악 활동, 연습 외에 과도한 스케줄을 소화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스트레스 조절 실패 등 사달이 나기도 한다.
또 최근 하이브가 앨범 패키지와 관련 '녹는 종이'를 강조했는데 민 대표가 "종이는 다 녹는다. 앨범을 덜 찍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하이브 경영진을 향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하세요"라고 힐난한 점도 K팝 팬덤 사이에선 화두다. 아직 성장주의에 방점이 찍혀 있는 K팝 기업에 완전한 ESG는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ESG 경영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 중인 건 맞다. 이 부분에 대한 실질적인 실천 방안을 세워야 한다는 게 업계의 현 과제다.
이번 사태로 음악과 무관한 경영진의 경영방식도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산업 영역보다 감성에 예민하고, 대중의 감정 반응에 더 민감한 업계 분위기를 톺아보는데 주력하기 보다 시장 논리를 구축하는데 더 주력했기 때문이다. 박지원 대표를 비롯 하이브 임원들은 게임·정보기술(IT) 인사들이 주축이다. 다른 업계 시장 논리의 관행으로만 밀어붙이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게임업계도 베끼기 논란 등이 산재해 있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다. '홀대 시비'에 휘말린 뉴진스를 비롯 아일릿 등이 상처를 받지 않게 어른들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절대적인 공통 의견이다. 여기에 사태가 르세라핌 그리고 하이브에 속했다 해체한 '여자친구' 그리고 SM 소속인 '에스파'에게까지 불똥이 튄 상황이다.
K팝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티스트다. 원래 아티스트라는 말은 평가절하됐던 아이돌들에겐 멀게 느껴지던 단어인데 K팝이 산업적으로 부상하고 미적인 영역까지 성취하면서 일반적인 용어가 됐다. 그 만큼 대우를 해주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사태에서도 아이돌들을 당연히 존중해줘야 한다. 민 대표와 하이브가 서로 아티스트를 팔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각자 방식으로 보호하려고 애쓰는 점은 다행이다.
김 평론가는 복잡한 K팝 제작 공정에 다양한 이들이 관여하고 있으며 그들과 함께 제작, 육성, 성장의 과정을 거쳐 등장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결국 K팝 그룹을 개인의 사유물, 수익을 위한 상품으로 생각하는 제작자들의 사고방식, 그리고 그들에게 정해진 역할만을 강요하고 경영권 등 경제적 논리로의 대결이 계속되는 한 K팝 그룹 멤버들은 위험한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임 평론가는 아티스트들이 주체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그는 "돈 문제, 방향성 문제로 운영자들이 갈등을 빚을 만한 불씨가 남아 있는 한 멤버들은 영영 휘둘리게 된다"면서 "좋은 음악, 좋은 시각 연출, 좋은 서사, 좋은 인재를 '회사'가 거머쥐고 주도하는 시스템 속에서 멤버들이 상처를 덜 받는 길은 스스로가 제작에서 어느 정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길밖에는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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