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학년도부터 더는 신입생 안 받기로
재학생·교수 "폐과 이유·과정 수긍 못해"
젊은층 외면에 바둑인구는 점점 고령화
'예절 교육·사고력 증진' 바둑학원도 사양
"치열한 입시·취업 경쟁에 여유 사라져"
[서울=뉴시스]박광온 권신혁 수습 기자 =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바둑학과인 명지대학교 바둑학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과거 예(禮)를 배우고 사고력을 높이는 학문이자 게임이었던 바둑학이 외면받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29일 명지대 측에 따르면, 명지대는 지난 25일 교무회의를 열고 예술체육대학 소속 바둑학과를 폐과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바둑학과는 오는 2025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세계 유일의 바둑학과에 대한 폐지가 추진된 2022년 조훈현 이창호 신진서 9단 등 국내 프로기사들은 물론 중국의 커제 9단 등 외국의 기사들까지 반대 서명에 동참했었다. 이같은 바둑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폐과를 결정한 것이다.
학교 측은 경영 악화와 더불어 바둑을 두는 젊은 층의 감소, 통합 명지대학교의 특성화 방향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 같은 결정에 재학생들과 교수들은 '수긍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남치형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뉴시스에 "폐지는 27년간 바둑학과를 다녀간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이고, 폐과의 이유나 과정 모두 수긍할 부분이 없다"며 "학과 운영이 학교에 부담이 되기는커녕 정원 문제도 일절 없고, 교수도 전임은 두 명뿐이고, 외국 유학생도 많다. 중국·일본의 바둑계와 한국 바둑을 차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바둑학과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학교의 폐과 결정에 너무 슬펐다. 바둑과 접목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던 제 꿈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1997년 개설된 명지대 바둑학과는 20여 년간 세계 유일 바둑학과로서 프로 기사 70여명 및 바둑 산업 분야 주요 인력들을 배출해 왔다. 또 바둑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했으며, 아시아를 넘어 유럽·미주 등지의 유학생들을 유치해 왔다.
지난 2022년까지 바둑학과에서 공부한 유학생 숫자는 대학원을 포함해 약 1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대학은 한 학과를 바라볼 때 학문적 가치가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이번 폐과 결정은 단순히 돈의 논리로 바라본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며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 바둑 경쟁력이 떨어지진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바둑은 40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전통적인 놀이 문화였고, 현대에도 두뇌 스포츠로 각광 받아왔다. 1980년대 이후 전세계 바둑계를 평정한 '조훈현 이창호'의 시대를 넘어 '이세돌 신진서'까지 한국 바둑은 세계 최고의 기량을 유지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PC, 모바일 게임 등에 익숙해지면서 장시간동안 눈을 떼지 않고 몰두해야 하는 바둑에 등을 돌렸다.
청소년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며 한때 바둑학원이 붐을 이뤘으나 최근에는 시들해졌다. 기원이나 바둑 학원이 줄면서 아예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도 늘었다. 대한바둑협회에 따르면, 바둑을 둘 줄 아는 인구의 추산 비율은 지난 1992년 36.3%에서 지난해 20.0%로 떨어졌다.
그마저도 바둑을 둘 줄 아는 인구 중 절반 가까이는 60대 이상 고령층 남성에 국한되는 모습이다. 실제 29일 오전 뉴시스가 찾은 서울 종로구의 한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손님 5명 모두 전부 70대 이상의 남성이었다.
기원에서 만난 심모(73)씨는 "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다. 과거엔 놀 수 있는 게 바둑 외엔 많지 않았으니까 바둑을 접하기 쉬웠다"며 "하지만 지금은 놀 게 많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바둑을 배울 이유가 크지는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대한바둑협회가 지난 1월 발간한 '바둑에 대한 국민인식 및 이용 실태조사 보고서'는 잠재 바둑 인구의 바둑 학습을 가로막는 주 요인으로 ▲바둑의 올드(old)한 이미지와 어려운 규칙으로 인한 낮은 접근성 ▲다른 놀이로 대체 가능 ▲바둑을 두는 사람이 없어 젊은 층이 바둑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음 등을 꼽았다.
초등학교 4학년인 김민준군은 "바둑은 너무 옛날 게임이라는 느낌이 들어 쉽게 다가가기 어렵고, 재미도 없을 것 같다"며 "다른 재밌는 게임이 많기도 하고, 학교·학원에 다니느라 시간도 많이 없다"고 전했다.
특히 과거엔 바둑은 사고력을 높이는 동시에 예(禮)를 갖출 수 있는 경기로 생각해,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바둑학원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수요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바둑계의 설명이다.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자녀를 키우는 김주현(36)씨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예를 배우고, 깊은 사고력을 기르라며 바둑 학원을 보냈다"며 "지금은 대부분 (바둑이 아닌) 일반 학원에 보내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둔 30대 박모씨도 "최근엔 의대 정원까지 늘면서 어릴 때부터 입시 경쟁에 들어가지 않으면 늦는다는 불안감이 부모들 사이에 있다"며 "차라리 축구나 골프 같은 사회 스포츠를 배우게 하는 게 향후 사회생활에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바둑의 쇠퇴는 어쩌면 이런 입시·취업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며 "남들보다 한수, 두수를 더 내다보고 어떤 수를 둬야 할지 고민하며 성장해 가는 것보다는 당장의 수학 성적이, 영어 성적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전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바둑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생각하고, 문제의식을 갖고, 싸울 힘을 기른 후 도전해 이기는, 한 수 한 수 사활을 건 싸움이다. 이런 바둑의 교육성이 제대로 비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다만 바둑계에서도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바둑의 접근성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바둑학과 폐지 수순을 밟고 있지만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그리고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바둑의 가치가 현대인의 취미생활로 다시 자리잡아 4000년 전통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공감언론 뉴시스 lighton@newsis.com, innovatio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