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에 갇힌 '의료 개혁'…의사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기사등록 2024/03/28 15:06:41 최종수정 2024/03/28 17:05:29

의료계, '필수의료 패키지' 첫단추부터 반대

"의대증원 과학적 근거 부족…변수 미반영"

"저수가·의료사고 부담 개선없인 효과 의문"

[서울=뉴시스] 정부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으로 대표되는 지역·필수의료 문제 해결책으로 의대증원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의료현장에서는 의대증원의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데다 저수가 개선·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 의료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국민의 부담만 늘어날 것이라며 원점 재검토를 촉구하고 있다. (그래픽= 안지혜 기자) hokma@newsis.com.
[서울=뉴시스] 백영미 기자 = 정부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으로 대표되는 지역·필수의료 문제 해결책으로 의대증원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의료현장에서는 의대증원의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데다 저수가 개선·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 의료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국민의 부담만 늘어날 것이라며 원점 재검토를 촉구하고 있다. 의정 갈등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과연 양측이 이 문제의 접점을 찾을수 있을 지 주목된다.

◆'의대 2000명 증원' 반대하는 이유

28일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달 초 정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는 ▲의료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확충 ▲공정 보상(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와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를 섞어서 진료하는 혼합진료 금지)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의대정원 확대는 의료인력 확충 정책 안에 담겨 있다.

우선, 정부는 지역·필수의료를 살리려면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의대증원 정책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의대정원 확대의 필요성을 처음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정부가 의대증원 근거 자료로 제시한 보고서 3개(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신영석 고려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권정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를 보면 의대정원을 2000명 늘려야 한다고 딱 떨어지게 밝히지 않았다. 또 현재의 보건의료 상황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가정 하에 필요한 의사 인력이 추계된 것으로, 미래의 정책적 변화, 의대의 교육환경, 인공지능(AI) 등 의료환경의 변화 등의 변수가 고려되지 않았다.

특히 의료계는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주원인인 일은 고되고 힘든데 보상은 턱없이 부족하고 의료소송 부담은 큰 현재 의료시스템의 개선 없이는 의사 수를 늘려도 필수의료 개선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전국 소아청소년과 사직 전공의들은 이날 호소문을 내고 "성인과 달리 소아진료는 장시간과 많은 인력, 기술을 요하지만 현재의 수가 체계는 이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면서 "반면 나날이 증가하는 의료 소송으로 인해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진료를 하다 보니 대다수의 소청과 전문의들이 뜻을 펼치지 못하고 다른 진료과를 선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대증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의대교수와 의대생이 의대교육의 질적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고, 입학 정원이 늘어나면 등록금 수입이 늘어나 대학병원 확충에 유리해지는 대학 총장의 의견만 받아 들여줬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생방송 TV토론회에 출연해 "내가 대학 다닐 당시 해부학 실습을 하는데 카데바(기증받은 시신)가 전체 6구 밖에 없어서 15~20명이 하나를 봤다”며 “의대생들은 병원 실습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은 기본적인 교육 여건인 강의실, 의대교수 부족은 물론 실습 여건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 배정안을 발표한 가운데 지역 거점 국립대인 충북대 의대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51명을 더 배정받았다. 현행 49명에서 200명으로 4배 이상 늘어난다. 충북대 의대 A 교수는 "교수를 단시간 내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학생 수가 4배로 늘면 4번에 걸쳐 수업을 해야 한다"면서 "학생들은 수술실에 들어가 서 있을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수술에 집중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세종=뉴시스]박민수 보건복지부(복지부) 제2차관이  22일  '2022년 제25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를 열고 필수의료지원대책 및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방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사진=복지부 제공) 2022.12.22.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근본적 해결책은 '낮은 수가' 해결

의료계에서는 필수의료 기피의 주원인인 낮은 수가 체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외국인 건강보험 무임승차를 막고 의료 과다 이용자의 본인 부담률을 90%로 올려 2028년까지 건강보험 재정 10조원 이상을 필수 의료 분야에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고질적인 저수가의 근본적인 원인인 수가 의사결정 구조를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수가는 평균 의료원가의 70% 정도 선에서 결정된다.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기 위해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책정되고 있다. 병원은 원가 이하로 책정되는 수가(급여)로 보는 손해를 비급여 수입으로 메우고 있다. 수가는 건강보험정책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건강보험정책심의회(건정심)에서 결정된다. 건정심은 복지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건강보험 가입자 대표 8명, 공익 대표 8명,  의약계 대표 8명 등 총 25명으로 구성된다.

지역 거점 국립대병원의 A 응급의학과 교수는 "수가를 올리려는 측 8명과 내리려는 측 16명이 의결해 결정하다 보니 수가를 인상하기 어려운 구조"라면서 "수가를 올리면 건강보험 재정 지출이 늘게 되고 국민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대 정권부터 폭탄 돌리기를 해왔다"고 말했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인 의료비 증가가 건강보험 재정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수가 인상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감사원 발표를 보면 건강보험 적립금은 2029년 소진되며 2040년 예상 누적적자가 680조 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 때문에 전공의 때 필수진료과에서 수련받은 후에도 해당 진료과 전문의로 계속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목소리도 많다.

 의료계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도 의대증원에 앞서 선행돼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모든 의료인의 책임보험·공제 가입을 전제로 의료사고 대상 공소제기를 제한하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연내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는데, 안정적인 필수의료 환경을 조성하려면 특례 적용 범위에 사망사고와 모든 진료과목을 포함해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태호 가톨릭의대 명예교수는 "현재 의사에 대한 형사처벌 빈도가 선진국의 최소 50배 이상이지만 북미, 유럽은 의료가 아예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서 "의료사고 특례법은 선진국이라면 아예 필요조차 없는 법안"이라고 말했다. 반면 환자·소비자·시민단체는 특례법 제정 발표를 철회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어 정부의 갈등 조정이 필수다.

[서울=뉴시스]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에서 가족으로 보이는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2024.03.22 


◆의료계 "지역 의료도 의료시스템 개선부터"

지역의료를 살리려면 상급종합병원은 중증환자를 집중 치료하고 그 외 병원은 전원된 경증 환자에게 적정 진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환자전원체계 개선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혈액종양내과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의 응급·중환자 병상 수는 OECD보다 적지 않고, 응급 급성기 병상의 경우 오히려 2~3배 정도 많다"면서 "응급실 뺑뺑이를 막으려면 3차 상급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려 하는 환자의 중증도가 낮다면 2차병원 후송을 의무화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의료계는 또 필수의료 패키지에 담긴 혼합진료 금지도 '독소조항'으로 보고 있다. 의료계는 환자의 의료 선택권을 제한할 수 있고 논의도 부족했다는 입장이다. 의료계 관계자는 "정부는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공식적인 만남만 28차례 가졌다고 강조하지만, 의대증원 규모, 혼합진료 금지, 개원 통제 등은 제대로 토론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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