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의 눈부신 성장을 보고도, 믿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SK하이닉스가 AMD와 함께 2013년 HBM를 개발했을 때만해도 업계 반응은 시큰둥했다.
당시 HBM은 고성능 D램보다 3배 이상 비쌌는데, "누가 그 돈을 주고 사겠느냐"는 회의론이 컸다. 반도체 시장을 역대 가장 뜨겁게 달군 4세대 HBM ‘HBM3’가 2021년 출시됐을 때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치열한 원가 경쟁에 기업 생존 문제가 달린 비정한 메모리 산업에서 값비싼 HBM은 수요가 불확실한 , ’구색 맞추기’ 상품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익성과 장래성에 대한 의구심으로 ‘그게 되겠어’라는 평가를 받았던 HBM을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히트상품’으로 바꾼 것은 무엇보다 SK하이닉스의 ‘뚝심’이었다.
지난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생성형 AI ‘챗GPT’ 성공도 마찬가지다.
최근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사장)은 “시간이 지나면 일반 서버 투자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생성형 AI가 전통적인 컴퓨팅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오면서 메모리 시장의 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시사했다. 일개 부품에 지나지 않았던 메모리 반도체가 제품 경쟁력을 결정 짓는 핵심 요소로 급부상한 것이다.
최근 반도체 산업의 장밋빛 전망 속에 천문학적 자금이 쏠리자 한국 반도체 업계에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HBM 시장의 90% 이상을 지배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의 '세계 2위'라는 동반 수혜가 기대된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면, 후발주자들이 선두권으로 치고 나갈 기회를 얻는다.
특히 미국이 자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에 한국 반도체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초기 시장 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 마이크론은 SK하이닉스가 HBM 기술을 개발하자, 이와 유사한 HMC(Hybrid Memory Cube) 기술에 2015~2017년 집중적으로 투자했지만, 표준화 경쟁에서 밀려 낭패를 봤다.
AI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가운데, 기업의 혁신이 성과를 낼 수 있게 정부가 전방위로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주 “각자의 문화를 보호하면서 AI의 경제적 잠재력을 이용하려면 모든 나라가 각자의 AI 인프라를 보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 역할을 강조했다.
반도체 산업은 이제 민간 주도의 시장에서 국가 대항전으로 대전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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