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이현주 기자 =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전에서 부산이 아쉽게 탈락했다. 정부와 재계가 뭉쳐 총력을 다해 외교전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오일머니를 앞세운 사우디아라비아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유치전 후발주자로 불리한 상황에서 시작한 경쟁이었지만, 민관이 힘을 합한 '코리아 원팀'은 저력을 보여줬다. 특히 재계는 국익을 위해 치열한 외교전쟁을 이끌었다.
◆재계, 총수 포함 총력전 펼쳤지만 사우디 '돈' 못 넘어
지난 2021년 7월 엑스포 유치를 위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가 출범했다. 김영주 전 한국무역협회장이 유치위원장을 맡았고, 각계각층 인사 78명이 유치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재계 인사로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최정우 포스코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허태수 GS 회장, 권오갑 현대중공업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등도 유치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조직을 꾸려야 했다. 다행히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경제계가 중심이 된 '부산엑스포 유치지원 민간위원회'가 출범했다. 최태원 회장이 한덕수 국무총리와 공동으로 회장을 맡았고, 삼성전자, 현대차, SK, LG, 롯데, 포스코, 한화, GS, 현대중공업, 신세계, CJ 등 11개 기업이 참여해 국내외 지원활동을 본격화 했다.
정부와 기업으로 구성된 원팀은 우선 기업별 중점 담당 국가를 선정해 교섭활동을 추진했다. 아프리카·개도국을 대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정부와 함께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등의 행사를 열었다. 기업별 유통망, 스포츠 구단, 홍보관 등을 통해 국내·외 홍보도 강화했다.
부산엑스포 유치위원회 민간위원장이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SK그룹 회장 등 '1인 3역'을 한 최태원 회장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올해 초 미국 CES와 스위스 다보스포럼, 파리 등에서 주요 엑스포 관계자들을 만났다. 또한 유럽 주요국을 돌며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호소했다.
최 회장은 지난 6월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가 열린 프랑스 파리로 출국할 때 목발을 짚고 나타나 엑스포 유치를 위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투표를 앞두고는 이달에만 중남미와 유럽 등 7개국을 돌았다. 비행 거리만 2만2000㎞로 지구 반 바퀴에 이르는 강행군 이었다.
삼성그룹도 이재용 회장을 비롯해 경영진 모두가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부터 중남미와 유럽 곳곳을 돌며 부산엑스포 지지를 요청했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등도 세계 여러 나라로 직접 가서 부산을 알렸다. 이 회장은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27일 귀국하면서 쉰 목소리로 "다들 열심히 했다"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총력전을 펼쳤음을 내비쳤다.
부산이 출발점인 롯데그룹의 신동빈 회장은 자신이 설립한 민간외교 단체 아시아소사이어티코리아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특히 신 회장이 일본 내 인맥을 풀 가동하면서, 일본이 투표를 며칠 앞두고 부산엑스포를 공개 지지한다는 뜻을 보이기도 했다.
LG그룹도 구광모 회장을 중심으로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구 회장은 지난해 폴란드 총리를 직접 예방하고 부산엑스포에 대해 알렸으며, 하범종 LG 경영지원부문장 사장은 파리에서 열린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국경일에 참석해 BIE 회원국 대사 70여명을 만나 지지를 요청했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외교부장관 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까지 가서 지지를 당부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21년 8월 국내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그룹 차원의 전담조직인 부산엑스포유치지원TFT를 구성할 정도로 주요 대기업 가운데 가장 큰 노력을 쏟았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스위스 다보스포럼이나 G20 정상회의 BIE 총회 기간에도 빠지지 않고 부산세계박람회 로고와 홍보 문구를 랩핑한 차량으로 유치 지원 활동을 펼쳤다.
부산 홍보대사를 자처한 정의선 회장은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미국, 유럽, 아세안 등 세계 곳곳을 돌며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요청했다. 정 회장은 특히 최태원 회장과 함께 BIE 투표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키면서, 최후의 한 표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3개 모자' 쓴 최태원, 3개월간 '목발 투혼'
최태원 회장은 '메종 드 부산(부산의 집)'이라는 거주 공간을 지난달부터 파리에 마련하고, 이를 거점으로 유치 활동을 벌이며 분투했지만 유치에 실패했다.
최 회장은 최종 투표를 앞둔 이달 초부터 세계박람회기구 회원국들이 몰려있는 중남미, 유럽의 7개국을 자의반 타의반 장거리 비행에 나섰다. 비행거리만 2만2000㎞로 지구 반바퀴에 이르는 강행군이었다.
최 회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처음 뛰어들었을 때는 승산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불가능한 싸움이었지만, 한국 정부와 여러 기업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어느 누구도 승부를 점칠 수 없을 만큼 바짝 추격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용기 대신 여객기 이코노미석도 마다하지 않았던 최 회장은 "매일 새로운 나라에서 여러 국가 총리와 내각을 만나 한 표라도 더 가져오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이 곳에서 엑스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2030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민간위원회가 공식 출범한 이후 550여일 동안 최 회장은 위원장을 맡아 전 세계를 누비며 고군분투했다.
SK그룹 회장뿐 아니라 대한상의 회장, 엑스포 민간유치위원장 등 '3개의 모자'를 쓴 최 회장은 국내, 아시아뿐 아니라 아프리카, 중남미, 유럽 등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며 부산엑스포 유치 지원 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올 들어 스위스 다보스포럼을 시작으로 유럽·아시아 등 대륙을 오가며 각국의 대통령, 총리, 대사 등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다. 최 회장은 자신이 만든 SK그룹의 대표적인 경영 행사인 '이천포럼' 개막식까지 건너 뛰는 등 부산엑스포 유치에 총력을 다했다.
지난 4월 엑스포 실사단이 방한했을 때는 삼성, SK, 현대차, LG, 포스코 등 주요 기업인들을 모아 환영 오찬을 갖기도 했다. 최 회장은 "험난한 과정이 예상되지만, 한국과 부산은 준비가 되었다"며 실사단에 거듭 강조했다.
올 여름 휴가 역시 반납하고 부산엑스포 홍보 활동에 매진했다. 최 회장은 유럽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를 방문하며 휴식 대신 엑스포 유치 활동에 전념했다.
올 하반기 SK그룹 최대 행사 중 하나인 'CEO 세미나' 역시 엑스포 유치 활동에 나선 경영진 일정을 고려해 파리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SK가 CEO 세미나를 해외에서 진행한 건 2009년 중국 베이징 이후 14년 만이다.
지난 6월 테니스를 치다가 발목 부상을 입은 최 회장은 목발을 짚고서도 종횡무진하는 투혼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응급실에 갈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지만 그는 직후 부산에서 진행된 제12회 한일 상의 회장단 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바야시 켄 일본상의 회장은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휠체어를 탄 최 회장을 직접 맞았고, 목발을 짚고 걷는 최 회장의 어깨를 감싸며 "천천히, 천천히 가라"고 배려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같은 달 파리에서 열린 부산엑스포 공식 리셉션에도 참가했다. 그는 특히 부산엑스포 로고를 새긴 홍보 패드를 부착한 목발을 행사 내내 짚고 다니며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다.
7월 제주포럼에서도 환영사를 위해 단상에 목발을 짚고 등장한 그는 "운동하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쳤는데 목발을 하고 다니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좀 불쌍해한다"며 "덕분에 동정을 얻어 엑스포 유치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하며 유쾌한 분위기를 끌어냈다.
최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을 모시고 여러 기업인들과 해외출장을 다녔는데 글로벌 정상, 기업인들과 제가 엑스포 로고를 붙인 목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며 "이걸 들고 다니면 사진을 찍은 것과 더불어 찍은 사람들이 부산엑스포를 지지해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국에서는 'break a leg',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면 숨은 의미가 있는데 행운을 빈다는 것"이라며 "제 다리가 부러졌지만 여러 분들에게 행운을 나눠드릴 수 있기 때문에 부러진 다리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다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그룹 내에서는 부상 회복 속도가 늦어져서 말리는 측근들도 다수 있었지만 엑스포 홍보를 향한 최 회장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며 "자신의 부상조차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는 최 회장이 대단할 뿐"이라고 밝혔다.
◆유치전 전폭 지원했던 재계, "글로벌 무대 도약" 위안
삼성, 현대차, SK, LG 등 국내 주요 그룹들은 이번 부산 엑스포 유치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온 만큼 큰 실망감을 토로했다.
재계 관계자는 "엑스포 유치를 통해 여러 차례 국제대회를 통해 보여준 국민적 역량을 다시 한번 모을 좋은 기회였는데, 유치가 좌절된 데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도 "엑스포가 어려운 글로벌 경영 환경 속에서 국가적 재도약의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만큼 재계의 일원으로서 아쉬움이 크다"고 밝혔다.
경제단체들도 침통한 분위기다.
특히 최 회장과 함께 이번에 부산엑스포 유치지원 민간위원회 사무국 역할을 맡은 대한상공회의소는 깊은 실망감을 나타냈다. 단 대한상의는 엑스포 유치 후발주자로 막판 선전을 거둔 것에 위안을 얻고 있다.
대한상의는 "국민들의 단합된 유치 노력은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한국 산업의 글로벌 지평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다만 이번 엑스포 유치전을 통해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위상을 높이는 기회가 됐다고 자평한다.
특히 홍보 기간 중 우리 기업과 브랜드의 글로벌 인지도 강화, 코로나 기간 중 못했던 신시장 개척, 공급망 다변화, 새로운 사업 기회 확보 등 부수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도 "엑스포 유치 노력 과정에서 이뤄진 전 세계 다양한 국가들과의 교류 역시, 향후 한국 경제의 신시장 개척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논평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금번 유치활동은 경제·문화적으로 발전된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많은 정상들과 만남을 통해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등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큰 성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아직 엑스포 유치 '재수'를 하자는 주장은 나오지 않고 있다.
경제효과가 크고, 그동안 쏟은 열정이 아깝지만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다만 평창올림픽은 3수, 여수박람회은 재수 끝에 개최에 성공했던 만큼 재도전에 나선다면 이번 유치전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부산, 엑스포 후보지 북항 재개발 등 지속 추진
부산은 2030 부산세계박람회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부산항 북항 재개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부산항 북항 재개발 사업은 총 3단계로 현재 1단계를 추진, 2027년 준공한다는 목표다. 2단계 재개발까지는 엑스포 개최에 맞춰 2030년 준공 예정이었으나 다소 늦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3단계까지 안정적으로 북항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재개발 1단계 사업은 북항을 친수해양관광 거점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오페라하우스, 마리나 시설, 경관수로, 국제여객터미널, 친수공원 등의 사업을 추진한다.
2단계는 해양관광 센터, 국제교류 센터, 국제업무지구, 상업지구, 주거 공간 등 북항을 신해양 복합산업 중심지로 육성하는 사업이다. 3단계는 동천변 친수 공간과 국제금융업무 조성이다.
부산시 엑스포유치홍보지원팀 관계자는 "부산 동구 북항 지역은 엑스포 개최시에는 전시회 부스가 마련되는 공간으로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유치가 무산돼 엑스포와 관계없이 재개발 사업으로 바로 돌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부산이 엑스포를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마쳤고 가덕도신공항,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메가시티 추진을 위해 다음 엑스포에 재도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부산엑스포 유치에 실패하면서 가덕도신공항의 공사 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해 조기 개항할 명분이 약해졌다. 이 때문에 공사 계획이나 개항 시기가 수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목소리도 들린다.
한 여권 관계자는 "재수에 도전할 가능성도 있다"며 "부산을 중심으로 주변 도시들까지 이를 토대로 새로운 변화의 기회를 마련하고, 대한민국 제2의 부흥기와 국가균형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어 재도전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상하이와 밀라노 등 지금까지 엑스포를 유치한 도시들도 글로벌 상업도시의 입지를 갖추며 성장한만큼 재도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엑스포의 생산유발 효과는 43조원에 달하고 18조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며 "엑스포 유치가 다른 도시들처럼 부산의 인지도를 상승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어 재도전 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lovelypsyche@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