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2.0 시대]
[편집자주] 미국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가 리튬이온배터리를 탑재한 첫 전기차를 내놓은 지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전기차는 기후변화를 막을 친환경차의 대명사로 꼽히며 빠르게 대중화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발 빠르게 전기차 전환에 나서고 있고, 배터리 산업도 급신장하는 모양새다.
이런 전기차 시장은 최근 새 전환점을 맞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마다 투자 확대와 고도화를 속속 진행 중이며, 배터리 산업도 이에 맞춰 기술 개발과 공급망 구축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앞으로 전기차 시장이 어떻게 바뀔 지 '전기차 2.0 시대'를 조망해본다.
[서울=뉴시스]유희석 안경무 강주희 기자 = ◆①"배기통 없애자"…모든 이동수단의 '전동화'
'굴뚝 산업'의 대명사이던 자동차 산업이 '전기·전자 산업'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엔진 대신 모터와 배터리가 중요해졌고,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기술 등 소프트웨어 기술의 접목으로 자동차는 '달리는 스마트폰'이 됐다. 내연기관 시대가 저물면서 자동차를 넘어 건설과 농업용 기계, 모터바이크는 물론 선박과 항공기까지 모든 이동수단이 전동화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올해 세계 전기차 판매 1400만대 전망
국제에너지지구(IEA)의 '2023 글로벌 EV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차는 지난해 세계적으로 1000만대 이상 팔렸다. 올해 판매 대수는 35% 더 늘어난 1400만대에 이를 전망이다. 폭발적인 성장으로 전체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4%에서 지난해 14%로 증가했다. 올해는 18%까지 높아질 전망이다.
세계 전기차 시장은 현재 중국·유럽연합(EU)·미국 등 3대 시장이 이끌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세계 전기 자동차 판매의 60%를 차지했고, 현재 도로를 달리는 모든 전기차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다. 유럽과 미국도 지난해 모두 전기차 매출이 전년 대비 각각 15%, 55% 급증하는 높은 성장세를 맞고 있다. 2030년 중국·EU·미국 등 3대 지역의 전체 자동차 판매량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60%에 달할 조짐이다.
아직 비중은 크지 않지만 전기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는 부지기수다. 지난해 인도와 인도네시아 전기차 판매 대수는 3배 이상 늘었다. 태국에서는 전년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전체 판매량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도 태국에서 3%,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는 각각 1.5%로 올랐다.
특히 인도 정부는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 육성을 위해 83억 달러(약 11조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고, 32억 달러(약 4조3000억원) 규모의 보조금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전기차는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글로벌 에너지경제의 원동력 중 하나"라며 "세계 자동차 제조 산업에 역사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연기관은 100년 넘게 독보적인 자리를 지켜왔지만, 전기차가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덧붙였다.
◇건설·농기계부터 선박·항공기까지 전동화 흐름
전동화는 승용차 시장을 넘어 버스와 트럭, 모터바이크 등 모든 이동수단에 영향을 주고 있다. 2040년에는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전기 모빌리티가 내연기관을 제치고 주류로 떠오를 전망이다. 단적으로 인도에서는 이미 지난해 새롭게 등록된 삼륜차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기모델이었다.
건설·농업·채광·철도 등에 사용되는 오프-하이웨이(중장비) 차량 시장에서도 전동화 흐름이 거세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팩트앤팩터스에 따르면 지난해 오프-하이웨이 전기차 시장 규모는 약 169억1000만 달러(약 22조6000억원)에 달했다. 이 시장은 올해부터 오는 2030년까지 약 21.5%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하며, 978억 달러(약 131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선박과 항공기 시장에서는 배터리 무게와 용량 등의 한계로 아직 전동화가 본격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중·소형을 중심으로 기술 개발과 함께 시장이 개화하고 있다. 특히 세계 상품무역의 80%를 차지하는 선박 시장에서는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추진선이 빠르게 늘고 있다. 노르웨이 선급 DNV에 따르면 세계 전기추진선 규모는 지난 5월 말 처음으로 1000척을 넘어섰다. 1년 전(379척)과 비교하면 60% 이상 급증한 수치다.
업계 관계자는 "선박과 항공기는 배터리 용량과 긴 충전시간 등의 한계로 아직 전기 동력을 상용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탄소 배출 감소 등 친환경을 위해 전기화는 꼭 필요한 일인 만큼 단거리 노선을 중심으로 전기 선박이나 항공기 투입이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②완성차업계, 전기차 '게임체인저' 경쟁 뜨겁다
일각에선 이같은 차별화 전략이 기존 전기차 산업 영역을 확장하거나 기업 실적을 가르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미래 전기차 주도권을 둘러싼 기업 경쟁이 다시 뜨거워질 전망이다.
◇줄어든 전기차 수요, 어떻게 키울까
25일 시장조사업체 마크라인즈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된 전기차는 총 434만2487대로 전년 동기보다 41.0% 증가했다. 경기 불황에도 판매량은 늘었지만 구체적으로 '시장 위기'가 엿보인다.
2021년 115.0%였던 전기차 판매 증가율은 지난해 61.2%로 반토막이 났고, 올 상반기는 50% 미만을 보였다. 한국만 해도 전기차 내수 판매량은 7만8977대로 전년 동기보다 16% 늘었지만 증가율은 이전보다 떨어졌다.
한동안 전기차 수요를 주도했던 각국의 보조금 정책까지 잇따라 축소되거나 폐지되면서 글로벌 완성차업계는 새로운 전략 마련에 나서고 있다. 소비자 이목을 끄는 디자인과 성능을 차별화해 판매 확대는 물론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포석이다.
◇현대차의 돌파구는 '고성능'
현대차가 선택한 차별화 전략은 '고성능'이다. 과거 내연기관차 개발을 통해 얻은 기술력을 전기차에 녹여 지난 5월 폭발적인 주행 성능을 갖춘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 5 N를 출시했다. 고성능 전기차 특성상 당장 판매 실적을 올리긴 어렵지만 시장에서 앞서 나간다는 이미지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다.
아이오닉 5 N은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3.4초로 국산차 중 가장 짧다. 그러나 단순히 빠르기만 한 전기차가 아니라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고성능차 다운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 혹독한 코스로 악명이 높은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두 번 연속 달리는 혹독한 테스트도 마쳤다.
현재 고성능 전기차 브랜드를 소유한 완성차 기업은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디 정도로 이중 현대차는 전기차 전용 브랜드와 고성능 브랜드를 함께 보유한 유일한 기업이다. 현대차는 아이오닉 5 N를 앞세워 전기차 시장 영역을 고성능 전기차 시장으로 확대하고, 독자적인 차별화로 입지를 다질 예정이다.
◇"눈길 끄는 전기차" 디자인으로 승부 본다
폭스바겐그룹은 독창적인 디자인의 신개념 전기차 출시를 예고했다. 올리버 블루메 폭스바겐그룹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에서 열린 미디어 나이트에서 "더 분명하고 차별화된 디자인 아이덴티티로 눈에 띄는 제품을 디자인하고 브랜드 차별화를 강화하겠다"고 디자인 중요성을 역설했다.
블루메 CEO는 이 같은 방침을 기존 모델은 물론 전기차에도 적용할 예정으로 강력한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그룹 정체성을 담은 상징적 디자인으로 고객 기대에 부응하고 매력적인 제품으로 경쟁력을 확대하겠다는 포석으로 읽힌다. 이날 행사에서 공개된 ID.GTI 콘셉트카는 폭스바겐그룹의 '디자인 중심' 성장 전략을 담은 모델로 평가받는다.
최근 전기차 업체로의 탈바꿈을 선언한 재규어랜드로버도 차별화를 위해 디자인에 더 주력할 방침이다. 제리 맥거번 최고창의책임자(CCO)는 외신 인터뷰에서 "예전 철학으로 돌아가 혁신적인 디자인의 신차를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재규어는 2025년까지 전기차 브랜드로 전환한다는 전략 아래 고가의 럭셔리 전기차를 개발해 브랜드 가치를 높일 방침이다.
◆③현대차그룹, 라인업 확대로 전기차 선두 나선다
국내 최대 자동차 기업이자 판매량 기준 글로벌 톱3 회사로 도약한 현대차그룹은 발 빠르게 전기차 시대를 대비해 국내외에서 상당 수준의 지위를 확보했다는 평가다.
현대차그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인 투자와 구체적인 전략으로 글로벌 판매량을 늘리며 전기차 시대 '퍼스트 무버'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현대차그룹, 글로벌 전기차 판매 확대 '주력'
현대차와 기아의 최우선 목표는 글로벌 판매량 증대에 있다. 먼저 올해 글로벌 시장에서 전기차 33만대 판매 계획을 세운 현대차는 2026년 94만대, 2030년 200만대로 판매량을 늘릴 계획이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을 3년 내에 3배, 7년 내 6배로 키운다는 의미다. 기아도 전기차 판매 목표를 ▲2026년 100만5000대 ▲2030년 160만대로 잡았다. 이로써 2030년 현대차와 기아의 전기차 판매 목표 대수는 총 360만대에 달한다.
현대차그룹은 단순히 전기차 판매량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판매에서 전기차 판매 비중을 확대한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현대차는 2030년까지 미국, 유럽, 한국 같은 글로벌 주요 지역에서 전기차 생산 비중을 48%까지 늘릴 예정이다.
현대차는 이를 위해 기존 내연기관 생산 라인에서 전기차 생산이 가능한 '혼류 생산' 체제로 전환하는 방법을 우선 추진하고, 이와 별도로 주요 시장에서 전기차 전용 공장까지 가동할 계획이다.
기아도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 등 친환경 차량 판매 비중을 55%까지 늘릴 방침이다. 기아는 올해 출시한 EV9을 포함해 2027년까지 총 15종의 전기차 판매 풀라인업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은 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태세다.
당장 현대차는 앞으로 10년간 전동화 관련 투자에만 35조8000억원을 투입한다. 특히 전동화에만 연 평균 3조6000억원을 쏟아부을 방침이다. 기아도 2027년까지 전동화에 32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이 중 45%가 전동화를 포함한 미래 사업에 쓰인다.
◇확연히 꺾인 전기차 성장세…'초저가형' 전기차 필요성 대두
그러나 현대차그룹이 이런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기차 성장세 둔화' 같은 허들을 먼저 넘어야 한다는 분석이다. 업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전기차 시장 성장률은 13.7%에 달한다.
이는 2021년 78%, 2022년 75.6% 성장한 것과 비교하면 성장세가 확실히 주춤한 모습이다. 실제 올해 1~8월까지 현대차 전기차의 주력 라인업인 아이오닉 5 내수 판매량은 전년 대비 41.0% 감소한 1만1915대에 그친다.
완성차 업계에선 초저가형 전기차부터 고급형 전기차까지 전기차 라인업을 더 확대해야 한다고 밝힌다.
이호근 대덕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현재 국내외 전기차 시장을 살펴 보면, 신기술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쓰고 싶어하는 이른바 '얼리어탭터' 성향 고객은 이미 전기차 구매를 완료했다고 볼 수 있다"며 "이런 부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기차 성능이 좋고 가격이 저렴해서 구입하려는 수요를 잡으려면 '초저가형' 전기차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국내에서 벤츠와 BMW 등 럭셔리 전기차들이 출시되자마자 잘 팔리고 있다"며 "이는 소비자가 아직도 전통 럭셔리 브랜드를 선호한다는 증거로, 현대차그룹도 프리미엄 모델을 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교수는 "테슬라와 중국발 '반값 전기차'의 공습이 조만간 나타날 것"이라며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가격을 낮추는 혁신 모델을 미리 선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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