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된장공장이 초정밀공장으로…日 엡손의 변신 비결은?

기사등록 2023/05/24 09:00:00 최종수정 2023/05/24 09:11:24

엡손 '省·小·精' 철학, 혁신 제품 지속 탄생

시계에서 시작해 프린터·LCD 등 지속 확장

신개념 제품 통해 지속 가능한 '미래 도전'

[나가노=뉴시스]엡손 본사 전경.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나가노=뉴시스]이인준 기자 = 일본 수도 도쿄에서 자동차로 3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한 나가노현 스와시. 온천 여행지이자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배경으로 알려진,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산간 마을 격이다.

사과와 와사비 등 농산물이 유명한 이 천혜의 자연 속에 연 매출 100억 달러(13조원) 이상을 올리는 글로벌 기업 본사가 있다. 바로 프린터로 익숙한 '세이코 엡손'(엡손)이다.

엡손은 지난 1942년 5월18일 오래된 된장공장 터에서 시계 부품 회사로 창업했다. 회사의 전신인 다이와 쿄고(大化工業)의 당시 직원 수는 단 9명. 하지만 엡손은 올해 현재 전 세계 81개 그룹사, 8만명 이상의 직원을 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적한 지방도시에서 탄생한 작은 회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 비결은 뭘까.
[나가노=뉴시스]엡손 기념관에 '쿼츠' 시계 크기의 변천사가 전시돼 있다.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최초의 역사' 써내려간 엡손의 '모노즈쿠리'
지난 22일 방문한 엡손 스와 본사에 있는 '모노즈쿠리' 박물관과 기념관은 엡손이 지난 81년간 쌓아 올린 '최초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모노즈쿠리는 물건을 뜻하는 '모노(物)'와 만들기를 의미하는 '즈쿠리(作り)'의 합성어다. 나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 우리로 치면 '장인 정신'과 통한다.

엡손이 그동안 '세계 최초'의 역사를 써내려온 것도 이런 모노즈쿠리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엡손은 세계 최초의 소형 디지털 프린터 'EP-101'(1968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 쿼츠 시계 '06LC'(1973년), 세계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 'HC-20'(1982년), 세계 최초의 잉크젯 프린터 'MJ-500'(1993년)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숱한 '최초 기록'을 써 내려왔다.

특히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1969년 출시된 세계 최초의 양산형 쿼츠 시계(전자식 시계) '아스트론 35SQ(Astron 35SQ)' 개발 역사는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 잡는다.

엡손(당시 스와 세이코샤)와 계열사인 K. 핫토리& Co.(현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는 1950년대 후반 정확성이 높은 차세대 손목시계 개발을 위한 전 세계 시계 회사들과의 경쟁에 참전했다.

그 결과 탄생한 이 제품은 장롱 한 짝만한 크기의 높이 210㎝ 쿼츠 시계를 불과 10년 만에 지름 3㎝의 크기로 줄이는 데 성공하며 전 세계 시계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이 제품은 작고 구조가 간단해 기계식 시계를 대신해 손목시계 대중화를 열었다. 더구나 높은 정확도는 산업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다.

엡손 관계자는 "당시 시간 오차가 월 5초, 일일 플러스마이너스(±) 0.2초에 불과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도 회사 관계자의 인터뷰와 함께 아스트론의 정확도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엡손의 손에서 탄생한 소형 쿼츠 시계는 이제 전 세계 시계 판매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업의 중심으로 현재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 권위의 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는 지난 2004년에 아스트론이 전자기기 산업 전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IEEE 마일스톤 상' 대상으로 선정했을 정도다.

◆재정 성과보다 '지속 가능성'으로 고객 가치 창출
엡손의 모노즈쿠리 정신은 오늘날에도 '성·소·정(省·小·精)'이라는 기업 철학으로 내려오고 있다.

각각 '고효율', '초소형', '초정밀' 혁신에 대응되는 이 경영 철학은 엡손이 추진하는 모든 활동으로 이어진다. 박물관과 기념관 곳곳에 전시된 각종 제품은 에너지 절약 솔루션, 공간 절약, 초정밀화 혁신 등 '사람과 지구를 풍요롭게 한다'라는 엡손의 기업 목적(Purpose)의 결과다.

비용을 들여 혁신 제품을 완성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제품도 많다.

엡손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TV 워치가 대표적이다. 이 제품은 영화 007 시리즈의 1983년 작품 '옥터퍼시(Octopussy)'에 등장할 정도로 혁신적인 제품으로 평가 받았다. 1984년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TV로 등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별도의 수신기가 필요한 데다, 비싼 가격 등으로 판매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셈이다.

엡손은 이 TV 시계 개발 경험을 통해 세계 최초로 LCD(액정표시장치)를 착색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엡손이 1984년 8월 출시한 세계 최초의 LCD 컬러 TV '포켓 TV ET-10'를 상용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시계에서 시작해 프린터, LCD(액정표시장치)로 점차 영역을 뻗어나간 것이다.

엡손의 기술력은 현재 원천 기술인 '3LCD' 기술로 이어져 빔프로젝트 시장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게 했다.

이 기술은 3개의 LCD를 사용해 광원을 빨강, 파랑, 초록의 3가지 색상으로 분리한 뒤, 프리즘을 통해 다시 합성해 스크린에 투영하는 것으로, 현존 기술 중 실물에 가장 가까운 색상을 표현한다. 또 흰 선이 순간적으로 빨강, 초록, 파란색 줄무늬로 보이는 '레인보우 현상'이 없어 장시간 시청 시에도 피로감을 줄였다. 엡손은 독보적인 3LCD 기술을 통해 전 세게 프로젝트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친환경 기술은 당장은 큰 이익을 보지 못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비즈니스 기회다."

엡손 야스노리 오가와(小川恭範)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수익 확보 전망이 불투명한 혁신 기술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엡손은 2030년까지 전사적으로 친환경 기술 개발에 1조원을 투자하고 있다.

엡손 관계자는 "엡손의 기술은 프린터와 프로젝터에서부터 로봇 및 웨어러블 제품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왔다"며 "앞으로도 사회와 지구에 기여하고, 모든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가노=뉴시스]엡손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TV 워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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