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안주하던 유럽, 러 대응 안보 군사력 강화
유럽 대륙 단결...지정학적 실용주의 '근육국가' 전환
러와 사이에 베를린 장벽 버금가는 장벽 세워져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우크라이나 전쟁이 냉전 이후 유럽 대륙을 영구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26일(현지시간) 진단했다. 다음은 기사요약.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은 “가면을 벗고 난 뒤 차가운 전쟁의 얼굴만 보인다”고 말했다.
10년 이상 재임한 니니스퇴 대통령은 핀란드의 실용주의적 대러 접근 정책을 펴며 블라디미르 푸틴과 자주 회동했다. 그러나 핀란드의 정책이 한 순간에 변했고 유럽의 푸틴에 대한 환상도 깨졌다.
유럽의 환상은 뿌리가 깊었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들이 수십 년 동안 평화를 누려왔다. 전쟁을 막는데 경제 교류 심화를 통한 상호의존성 강화가 최선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러나 푸틴 치하의 러시아는 갈수록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복고주의적이고 잔인해졌다.
니니스퇴 대통령은 뮌헨 안보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당연시했다”면서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신청은 2021년까지 생각조차 못하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평화 심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독일에서조차 군사력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전 유럽대륙이 우크라이나의 자유 수호를 자국의 자유 수호로 여기고 엄청난 지원을 하고 있다. 탱크를 지원하기로 했고 F-16 전투기 지원도 거론되고 있다. EU의 우크라이나 군사지원액이 38억 달러(약 5조 원)에 달한다.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500억 달러(약 66조 원) 이상의 지원을 약속했고 러시아를 10차례 제재했으며 우크라이나 피난민 800만 명을 받아들였고 물가상승을 감수하면서 러시아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끊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1년 전 연설에서 1120억 달러(약 147조 원)의 국방비를 발표하면서 “시대적 전환”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유럽에서 핵전쟁이 일어나는 일이 공상과학 소설 속의 일 만이 아니라고도 했다.
냉전 이후 시대가 빠르게 강대국간 대치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세계 질서가 새롭게 재편하는 시기에 유럽도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 프랑스와즈 델라트르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인 정체성을 묻고 있다고 지적했다.
푸틴은 퇴폐적인 서방 유럽이 뿌리를 잃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78년 동안 안보를 미국에 크게 의존해왔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은 유럽의 지원을 크게 넘는 300억 달러(약 39조5000억 원)에 달한다. 유럽이 군사 강국이 되려면 아직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EU는 군사력 강화 방안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푸틴의 완전한 패배를 원하는 중동부 유럽국들과 타협을 바라는 독일, 프랑스 등 사이의 조율, 내년 미국 대선 이후에도 미국이 우크라이나 지원을 계속할 지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와중에 유럽의 대응책도 마련해야 한다.
한 마디로 유럽은 평화 강국에서 지정학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근육 국가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럽 대륙을 단결시켰다. 푸틴으로선 원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결과다.
200년도 더 전에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핀란드에는 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깊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핀란드는 영토의 12%를 러시아에 빼앗기기도 했다. 전후 내내 핀란드는 병역이 의무였으며 중립국으로 남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한 달 전까지도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는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 신청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단언했었다. 여론 조사에서도 가입 지지가 20~30%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2월24일 한 순간에 장막이 내려졌다. 핀란드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압박했다. 국민들은 러시아에 괴롭힘 당한 과거가 고통스러웠다고 느꼈다. 푸틴 정권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게 됐다. 나토 가입 지지가 70%로 치솟았다. 3개월 만에 핀란드는 스웨덴과 함께 나토 가입 신청을 했다. 마린 총리는 뮌헨안보회의에서 “핀란드가 푸틴이 넘지 못할 금지선이 무엇일까를 자문했으며 그건 나토였다”고 말했다.
200년 이상 전쟁을 겪지 않은 스웨덴도 비슷한 상황이다. 발트해 연안국들 모두가 나토 회원국이 되면서 전략적 여건이 변화했다.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회색지대가 사라지고 직접 마주하는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도 EU와 나토 가입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나 유럽국들은 러시아와 분쟁중인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대해 독일 주재 델라트르 프랑스 대사는 “푸틴이 전쟁을 교착시킬 것이다. 영토 일부가 점령된 채 제 기능을 못하는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승리, 러시아 승리, 교착 등 세 가지 가능한 해결 방안 가운데 두 가지가 푸틴에게 도움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제재와 고립으로 고통을 받는 러시아가 전쟁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폴란드와 독일은 냉전 이후 시대에 가장 대조적인 나라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위협을 민감하게 의식해왔으나 값싼 러시아 에너지에 중독된 독일은 둔감했다. 폴란드에선 우크라이나 지원을 주저하는 독일에 대한 비판 정서가 크게 확산하면서 총선을 앞 둔 집권 여당이 독일을 믿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다. 폴란드는 영웅정신과 희생정신이 강조되는 나라다.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 유럽에 편입되려면 불가피하다는 정서가 팽배하다.
독일은 나치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의를 위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정서가 우세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우크라이나가 정의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는 정서가 확산하고 있다.
유럽 최강국인 독일이 한 순간에 국방 정책을 바꾸고 평화문화와 결별하고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차단했으며 심지어 전략적 취약성을 줄이기 위해 독일 차량의 거대 시장인 중국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유럽 변화의 관건은 독일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 지다. 독일이 경제력에 걸맞는 군사 강국이 될 수 있을 지와 다른 유럽국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도 관건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유럽은 전략적 책임감을 높여야 하게 됐다. 쉽지 않은 일이다. 유럽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필요한 든든한 억지력을 위한 국방비 증가가 뒤따라야 하는 때문이다. 최소한 유럽국들은 푸틴의 승리를 막을 수 있어야 한다.
푸틴이 만든 유럽의 장벽은 냉전시대 베를린 장벽 만큼 공고하지는 않을 지라도 분명 만들어졌다. 헬싱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잇는 도로 위 핀란드 국경 도시 발리마는 과거 양국을 오가는 사람들이 길게 줄섰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차선으로 이뤄진 국경검문소가 텅 비었고 북적이던 인근의 대형 쇼핑몰도 한산한 상태다. 단절을 드러내는 이 같은 모습이 유럽 대륙이 갈라졌음을 새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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