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주연 기자 = 함양 어르신들이 직접 따서 말린 꽃을 이용한 압화 공예, 하동 정씨 문중의 '솔송주'로 만드는 칵테일, 거연정에서 동호정으로 이어지는 선비문화탐방로 트레킹과 국악 공연, 고즈넉한 한옥의 밤과 아침….
백두대간 지리산과 덕유산이 자리하고 있는 경남 함양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무려 15개에 이르는 산과 선비의 고장이다. 인구가 4만명을 밑도는 작은 곳이지만 산세와 자연환경, 수백년 전통의 한옥과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 문화의 매력은 거대하다.
중국 진시황이 불로초 산삼을 구하기 위해 서복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사림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을 비롯한 서원들, 곳곳의 누각과 정자에는 지금도 옛 선비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난달 29~30일 직접 가본 함양은 낮에는 고즈넉한 한옥과 곳곳에 흐드러진 꽃들이, 밤에는 쏟아질 것만 같은 별빛과 풀벌레 소리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미스터선샤인 속 바로 그 집…개평한옥마을
개평한옥마을에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채가 전통과 멋을 지키며 수백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을 비롯해 '연모', '다모', '토지' 등이 촬영돼 유명세를 탄 곳이기도 하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1570년 지어진 일두고택을 비롯해 1880년에 지어진 하동정씨고가, 1838년에 지어진 오담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등이 이어진다.
일두고택은 조선초기 성리학자 일두 정여창이 태어난 곳이다.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동방5현으로 꼽혔던 정여창은 성리학의 대가다. 일두(一蠹)라는 호는 '한 마리 좀벌레'라는 뜻으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했던 그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1498년(연산군) 친구 김일손의 사초로 시작된 무오사화에 연루, 함경도 종성에 유배됐고, 1504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1504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고난을 겪었지만 사후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일두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됐다. 1만㎡의 넓은 대지 위에 솟을대문을 비롯해 행랑채·사랑채·안채·곳간·별당·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솟을대문에는 다섯 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음을 알리는 5개의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걸려 있다. 사랑채는 호방하다. 큼직한 충효절의(忠孝節義) 벽서가 시선을 빼앗고,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걸렸다. 누마루에는 '탁청재(濯淸齋)라는 편액이 따로 걸렸다. 마음을 맑게 닦는 곳이라는 뜻이다. 누마루 앞에는 석가산(정원 따위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이 조성돼 감탄을 자아낸다.
일두고택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안방마님이 머무르던 고택 안채에 새며느리방을 뒀는데, 좋은 자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안채 앞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우물이 자리잡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임숙조 문화관광해설사는 "마을이 풍수적으로 배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을 안에 우물을 파는게 금기시됐다"며 "하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교장이 학교와 일두고택에 우물을 팠고, 그 우물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동정씨 문중 솔송주로 만드는 칵테일 '담솔줄렙'
"시집오니 시어머니가 술 빚는 법을 가르쳐주시더라고요. 일제시대에는 밀주도 하고, 술독도 빼앗기고…. 정말 근근이 이어온 술이죠."(박흥선 명인)
개평한옥마을을 대표하는 술은 하동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530년 전통의 가양주 '지리산 솔송주'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주로 선정됐으며 이후 다양한 공식석상에서 건배주나 만찬주로 이름을 알렸다.
솔송주는 조선 정종의 손녀이자 정여창 선생의 부인이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송순과 솔잎을 넣어 직접 술을 빚으면서 시작됐다. 현재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이자 식품명인 박흥선 명인이 하동정씨 집안의 비법을 전수받아 술을 빚고 있다.
솔송주는 누룩만들기-밑술제조-솔잎·송순 채취-고두밥찌기-밑술·솔잎·고두밥 버무리기-발효-거르기 등 일곱 단계를 거쳐 빚어진다. 솔잎은 개평마을 뒷산의 소나무 숲에서 솔잎이 가장 향긋한 이른 봄에 채취하며, 송순은 가장 생명력이 있을 늦봄에 채취한다.
함양군과 생활관광운영위원회가 마련한 '함양 온데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소줏고리를 이용해 옛 방식으로 내려진 40도 이상 솔송주(담솔)을 맛볼 수 있다. 갓 내려 따뜻한 담술에서 깊은 솔향이 느껴진다. 담솔를 이용한 칵테일도 만들어볼 수 있다. 솔송주를 소줏고리를 통해 증류한 담솔은 도수가 40도를 넘어선다. 담솔 45ML에 라임, 민트, 탄산수를 섞으면 칵테일 '담솔줄렙'이 탄생한다.
개평한옥마을 곳곳에 흐드러진 꽃으로 '압화체험'도 할 수 있다. 압화란 꽃과 식물을 누름건조해 액자, 부채 등의 작품을 만드는 꽃 공예다. 체험에 사용되는 모든 꽃들은 함양의 어르신들이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을 직접 손질하고 말려 만든 것이다.
◆빛의 노래, 서원을 밝히다…유네스코 세계유산 '남계서원'
남계서원은 동방5현 일두 정여창을 모시는 전국 서원 9곳 중 가장 중요한 곳이다. 1552년(명종7)에 지어졌고, 1556년 남계(藍溪)라는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에 이은 두번째 사액서원이 됐다.
남계서원은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동재·서재·경판고(장판각)·사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국내 최초의 '전학후묘' 형태로, 낮은 곳에서 공부하고 높은 곳에 사당을 뒀다. 남계서원에서는 지금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009년 사적으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오는 30일까지 한달간 펼쳐지는 함양 남계서원 세계유산 미디어아트 '빛의 노래, 서원을 밝히다'를 관람하면 남계서원의 색다른 매력을 즐길 수 있다.
서원 광장 앞 풍영루를 배경으로 하는 미디어파사드, 레이저쇼, 서원내부를 활용한 미디어 연출, 실감형 콘텐츠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청사초롱 달빛야행, 세계유산명품둘레길 등 다양한 연계프로그램도 이어진다. 남계서원 방문 편의를 위한 셔틀버스도 운행된다.
◆정자 즐비한 '화림계곡'…천년역사 인공림 '상림'
서하면 화림동 계곡은 함양에 들렀다면 꼭 가봐야할 곳이다. 과거보러 떠나는 영남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재를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으로, 예쁜 정자와 시원한 너럭바위가 많아 '팔담팔정(八潭八亭 8개의 못과 8개 정자)'으로 불렀다.
현재는 농월정터-동호정-군자정-거연정을 잇는 6.2㎞ '선비문화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옛 선비들이 지나쳤던 짙은 숲과 맑은 계곡, 풍류를 즐겼던 단아한 정자가 어우러진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한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90년께 지은 정자다. '해를 덮을 만큼 큰 바위'를 뜻하는 차일암(遮日岩)과 짙푸른 숲, 여유 있게 흐르는 물줄기가 평온한 기운을 내뿜는다.
동호정 정자 천장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조각이다. 보통 용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데 이곳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말린 통나무에 도끼질 몇 번으로 투박하게 만든 계단은 정자를 만든 이의 배포를 느끼게 한다.
함양군은 온데이프로그램을 통해 동호정을 찾는 이들에게 국악공연을 선사한다. 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장을 맡고 있는 진막순 선생이 아이랑과 너영 나영 등 국악 연주를 들려줬다. 잠시 조선시대의 선비가 된 기분에 빠져들었다.
구혜령 문화관광해설사는 "거연정부터 동호정까지 선비문화탐방로를 걷고 동호정에서 국악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함양에는 1100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 '상림'이 있다. 신라시대 학자 고운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조성한 곳이다.
최치원은 함양읍 중앙을 흐르는 강물로 인한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아 강물을 돌리고,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120여 종의 낙엽활엽수와 2만여종의 식물들이 1.6km의 둑을 따라 80~20m 폭으로 조성돼 있다. 함화루, 사운정, 초선정, 화수정 등 정자와 최치원 신도비, 만세기념비, 척화비, 이은리 석불, 다볕당 등 볼거리도 다양하다.
◆고즈넉한 한옥 숙소…산삼캐기 체험도
덕유산과 지리산 등 명산의 줄기에 자리잡은 함양은 산삼과 산약초들이 많이 자생하는 곳이다. 지난 8월에는 이곳에서 감정가가 1억2000만원에 이르는 100년근 천종산삼 7뿌리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온데이프로그램에서는 40년 경험의 심마니가 재배하는 산삼농원에서 산삼캐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산양삼과 인삼, 약초가 즐비한 안의시장에 가면 함양의 다양한 약초를 구경하고, 구매할 수도 있다.
하루 일정이 끝한 후 고즈넉한 한옥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특별하다. 도시의 빛 공해가 없는 까만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자동차의 소음 대신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함양군은 문화유산과 수려한 풍경을 알리기 위해 자넌 6월16일부터 오는 11월10일까지 생활관광 프로그램 '함양온데이'를 운영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진하는 생활관광 살아보기형(체류형) 공모사업으로, 3박4일간 한옥에 머무르며 함양의 문화유산을 체험하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일로당 한옥스테이, 남계한옥스테이, 지리산 태고재 등 3곳의 한옥민박에서 숙박할 수 있다.
진병영 함양군수는 "함양은 사림이 잘 형성되고 학구열이 높았던 지역으로, 조선시대 2번째 사액서원인 남계서원 등 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이라며 "지리산·덕유산 등 해발 1000M이상의 산이 15개나 되고 전체 면적의 78%가 산이다보니 산양삼 재배 등이 활발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제가 젊을 때는 서울에서 함양까지 오려면 하루가 걸렸지만 지금은 3시간이면 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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