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3주년] '봉기·폭동·항쟁·사건'…이름 짓지 못한 역사

기사등록 2021/04/02 08:01:00

4·3특별법 제정 후 정명 문제…완전한 해결을 위한 길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제주 4·3 73주년 추념일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비'가 놓여있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아직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한다. 2021.04.01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 강경태 기자 =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 평화전시관에는 누워있는 백비(白碑)가 있다. 4·3이 발생한 지 73년이 흘렀지만,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채 누워있다. 4·3의 이름을 여전히 짓지 못해 백비는 여전히 세워지지 않고 있다.

제주4·3의 이름을 찾는 정명(正名) 논의는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4·3은 역사적 인식, 이념에 따라 봉기, 폭동, 항쟁, 사건 등으로 불리고 있다.

4·3 정명은 과거부터 연구와 논의가 이뤄졌지만,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4·19 혁명 이후 제주대 학생들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 처음으로 4·3의 진상조사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로 이어졌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진상규명의 노력이 수포가 됐다. 군사정권 시기에도 도내 대학가에서는 4·3을 공부하고 기억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군사정권은 4·3을 폭동으로 규정해 철저히 금기시했으며, 지금도 일부 보수세력은 폭동으로 여기고 있다.

[제주=뉴시스]강경태 기자 =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된 후 열린 대도민 보고대회가 지난달 5일 제주시 관덕정에서 열린 가운데 행사 참가자들이 제주4·3특별법 개정을 기뻐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2021.03.05. ktk2807@newsis.com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금기시됐던 4·3에 대한 증언 채록조사, 학술연구가 진행됐고, 이때부터 4·3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항쟁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정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003년 10월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했지만,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며 4·3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하지 않았다.

4·3의 정명 운동은 2018년 4·3 70주년을 맞아 활발하게 전개됐다. 4·3이 제도화 이후 억울한 죽음에만 초점이 맞춰져 당시 민중들은 희생의 객체로만 인식되는 한계를 극복하고, 공동체와 역사의 주체로 조명하자는 의미였다.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공산주의자 주도 ▲불법행위 존재 ▲실패한 항쟁 ▲항쟁과 학살 중 중심의 모호성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경우에 따라 4·3을 항쟁과 학살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면서도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이름을 붙일 때 역풍이 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신중론을 피력했다.

이와 함께 제주 역사의 특수성을 고려한 ‘민중운동’,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항쟁’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돼 왔다.

[제주=뉴시스]우장호 기자 = 제주 4·3 73주년 추념일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지에 추모 국화꽃이 놓여 있다.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공포된 이후 처음 치러지는 의미를 담아 올해 추념식의 주제는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동백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로 정해졌다. 2021.04.01 woo1223@newsis.com
특히 4·3을 폭동이나 좌우 대립의 소요사태 등으로 소개했던 한국사 교과서 8종이 지난해부터 단독선거 저지와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무장봉기 등으로 반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4·3 추가 진상규명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4·3을 파악해야 바른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담지 못한 행방불명 수형인과 미국 정부가 보관 중인 4·3 관련 자료, 4·3 관련 미군정의 책임 규명 등 추가 진상조사가 요구되고 있다.

또 4·3 당시 상처를 입어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 29명의 경우 4·3위원회가 연령이 높아진데 따른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판단해 후유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개인의 후유증이 4·3 당시 부상으로 인한 것인지 자연발생적인지에 대한 의학적 판단 기준의 필요성도 제기되는 만큼 미군정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와 후유 장애에 대한 문제 등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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