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고려왕릉 단독연재] ⑪짧은 재위 기간만큼 초라한 순종묘

기사등록 2020/03/14 06:00:00 최종수정 2020/04/06 11:09:04

머리 부분 잘려나간 1쌍의 문인석

석수도 2개만 달랑 남아 썰렁

정비된 최근 모습 단독 공개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1. 4개월 단명한 순종의 협소한 무덤 성릉(成陵)

고려 12대 순종(順宗)은 고려 전체를 통틀어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다. 그는 문종(文宗)의 장남으로, 원래 이름은 왕휴(王烋)였으나, 뒤에 왕훈(王勳)으로 고쳤다. 순종은 1047년(문종 1)에 태어났고,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였다. 그가 왕태자로 책봉된 것은 8세 때인 1054년(문종 8년) 2월이었다.
 
문종은 왕훈의 태자 책봉을 거란 등에 사신을 보내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공인받았다. 문종은 대내적으로도 왕훈의 위상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1056년(문종 10) 9월에는 왕훈에게 여러 종친들 및 신하들과 함께 하는 잔치를 주관하도록 했고, 10월에는 태묘(太廟)에 배알하도록 했다. 신하들과 잔치를 열 때에도 태자와 동석했다는 기록이 다른 왕대와 비교하여 유독 자주 등장한다. 1078년(문종 32)에는 송(宋)에서 온 사신단을 인도하는 임무를 명하기도 하였다.
 
순종의 태자 활동은 문종의 오랜 재위 기간으로 다른 왕 때보다 상대적으로 길었다. 왕훈은 이렇게 오랫동안 태자로 있으면서, 어려서는 문종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고, 장성해 부왕(父王)을 보필하며 정치 경험을 쌓았다.
 
문종은 1083년(문종 37) 7월에 병이 심해지자 왕위를 태자에게 넘기고 곧 사망했다. 마침내 왕훈은 고려의 12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순종은 젊어서부터 병이 있었고, 부친의 상을 치르며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결국 즉위한 지 4개월만에 동생 왕운(王運)에게 왕위를 전하고 사망한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른 죽음이었다. 오랜 세월 태자로서 국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너무 짧았다.
 
순종의 능호는 성릉(成陵)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순종은 나성(羅城) 남쪽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봉산(進鳳山) 남쪽 양양현(壤陽峴)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시 진봉리다. 무덤이 있는 곳은 ‘왕릉골’이라 부르며 낮은 능선 위에 있고, 진봉산 남쪽 능선에 있는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영릉(榮陵), 6대 성종(成宗)의 강릉(康陵)의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진봉리 진봉산 남쪽에 있는 고려 12대 순종(順宗)의 무덤인 성릉(成陵) 전경. 남쪽에는 보존유적 568호로 알려져 있지만 무덤 표지석에는 569호로 돼 있는 게 확인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12대 순종(順宗)의 성릉(成陵) 전경. 묘 앞에 조선후기에 세운 표지석이 반 토막 난 상태로 있었지만 현재는 이 마저도 없어졌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3.14. photo@newsis.com(*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재위기간이 짧아서 일까. 성릉의 묘역은 협소하고 조선시대에도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듯하다. 봉분의 높이는 약 1.6m이고 직경은 약 8m이다. 현재 봉분이 있는 1단에는 2개의 석수(石獸)만 확인된다. 2단은 석축이 무너져 내려 원래 형태가 남아 있지 않고, 머리 부분이 잘려나간 1쌍의 문인석(文人石)만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조사 때 문인석이 넘어진 채 방치된 것을 북한이 묘역을 정비하면서 좌우에 세워놓은 것이다. 조사과정에서 위쪽에 큰 도굴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고, 정자각터에서도 초석 몇 개만 있었다고 한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진봉리 진봉산 남쪽에 있는 고려 12대 순종(順宗)의 무덤인 성릉(成陵)의 서쪽 측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진봉리 진봉산 남쪽에 있는 고려 12대 순종(順宗)의 무덤인 성릉(成陵)의 서쪽 측면에 남아 있는 난간석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진봉리 진봉산 남쪽에 있는 고려 12대 순종(順宗)의 무덤인 성릉(成陵)의 동쪽 측면 모습.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14. photo@newsis.com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무덤 앞에 조선시대 때 세운 비석이 반 토막 난 채로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는 그나마도 없어진 것이 확인된다. 남쪽에는 성릉이 보존유적 568호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표지석에는 보존유적 569호로 기록돼 있다.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진봉리 진봉산 남쪽에 있는 고려 12대 순종(順宗)의 무덤인 성릉(成陵)의 1단 서쪽에 있는 석수(石獸) 모습(왼쪽)과 동쪽에 있는 석수.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개성직할시 진봉리 진봉산 남쪽에 있는 고려 12대 순종(順宗)의 무덤인 성릉(成陵)의 2단 서쪽에 있는 문인석(文人石) 모습(왼쪽)과 동쪽에 있는 문인석(오른쪽). 모두 머리 부분이 깨져 없어졌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3.14. photo@newsis.com

- 북한, ‘고읍리1호 무덤’을 선종 무덤으로 발표

재위 4개월만에 순종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왕운(王運)이 왕위를 계승했다. 고려 13대 선종(宣宗, 1049년~1094년)이다. 선종은 부왕인 문종(文宗)부터 16대 예종까지 이르는 고려의 전성기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군왕으로 평가된다.

그는 거란, 여진과의 대외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고 송(宋)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수준을 한층 높였다. 불교를 신봉해 1089년(선종 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웠으며,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위하여 추진한 천태종 본산 국청사(國淸寺)의 건설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시켰다. 다만 계속된 토목공사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능은 개성 도성의 동쪽에 있으며 능호는 인릉(仁陵)이다.

인릉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부왕인 문종의 경릉(景陵)에서 동쪽에 있는 배룡산(390m) 남쪽 궁릉골 주변에는 현재 100여 기 이상의 무덤군이 흩어져 있는데, 북한은 그 중 2개의 무덤을 고려 중기의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장풍군 고읍리다.
 
북한의 개성고려박물관과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2000년 ‘고읍리 2호 돌칸흙무덤’(‘고읍리 2릉’)이라 명명한 무덤을 조사한 후 이 무덤이 고려 13대 선종의 능이라고 발표했다.

북한은 “학자들이 고려사, 중경지(中京誌) 등의 고문헌을 토대로 고읍리 고분군 현지를 답사하고, 무덤 내 구조물 짜임새와 판석·판돌 규모, 출토된 유물 등을 분석해 이 같은 사실을 과학적으로 고증했다”고 밝혔다.
 
‘인릉’은 봉분 둘레에 돌난간, 석수, 망주석, 제당터 등이 장식돼 있고, 묘실은 길이 3.44m, 너비 2.18m, 높이 2.16m이며, 관대(棺臺)는 길이 2.8m, 너비 1.4m, 두께 0.16m로 조사됐다.

북한은 “인릉은 관대의 너비가 1.4m로 다른 왕릉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 특이하며, 이는 인릉이 부부 합장묘임을 의미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묘지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왕릉이 인릉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이다.
 
한편 북한 학계는 2000년에 ‘고읍리 2릉’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고읍리 1릉’을 고려 18대 의종(毅宗1127∼1173년)의 희릉(禧陵)이라고 발표했는데, 이 역시 확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종의 아들인 고려 14대 헌종(獻宗, 1084-1097)의 은릉(隱陵) 또한 개성 도성 동쪽에 있다고 기록돼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고읍리 1릉’과 ‘고읍리 2릉’은 발굴 결과 전형적인 고려 왕릉의 양식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왕릉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덤의 주인공은 남북 역사학계의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이뤄져야 밝혀질 것 같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