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그림은 절로 크지 않는다. 화가는 그림을 낳지만, 그림을 키우는 건 컬렉터다.
시작가는 6억5000만 원.
낙찰되면 2014년 작가의 '진진묘'(1970)가 기록한 역대 최고가(5억6000만 원)을 넘게 된다.
경매장에 오른 '독'(45.8×38cm). 그동안 알려진 화풍과는 사뭇 달랐다. 새·나무·자동차·사람, 동심과 밝은 익살이 가득한 그림들과 달리 어둡고 묵직했다.
'된장 맛'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은 우리민족의 질곡의 역사가 담겼다. 1949년 세상에 나와 한국전쟁을 겪고 모진 풍파를 거치면서도 질기게 살아냈다.
그렇게 '깨지지 않은 독'은 68년만에 긴 잠에서 깨어났다. 2017년 3월 서울옥션 경매, 경매사의 '이 작품 팔립니다' 응원과 함께 6억5000만원에 나온 '독'은 1분도 안돼 7억에 올라섰다.
'7억!. 풍진 세월을 둥글게 말아 거무튀튀하게 덩어리가 된 '독'은 살아있음의 환희를 누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낙찰받아 '국가 미술품'으로 소장됐다.
"나는 심플하다.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다"고 외쳤던 장욱진(1917~1990)화백의 작품이다.
한 개인의 소장품 아닌 국민 모두가 볼 수 있는 '국가 소장품'이 되기까지 사연이 있다.
한 미술품 수집가의 사랑이 빚은 열정 덕분이다. 미술계에서 알아주는 컬렉터 이우복 前 대우 회장 컬렉션이었다.
8호 크기 '독'은 신사실파 제 2회전에 전시한 그림으로 한국 추상미술사의 초창기를 수놓은 의미가 큰 작품이다. 장욱진은 한국 추상화 선구자들이었던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과 1948년 결성한 ‘신사실파’ 동인이었다. 당시 장욱진이 '독'을 포함, 유화 13점을 전시했는데 구도와 도상의 상징성으로 전시 작품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뒤 행적이 묘연해졌다가 1970년대초 이우복 회장에게 나타났다. 화폭이 너덜너덜해진 그림이었지만 화상은 몸값으로 100만원을 불렀다. 당시로서 거액이었지만 이 회장은 군말없이 돈을 건넸다. 이후 70년대 말 비행기에 갈라지고 찢어진 '독'을 실어 프랑스 파리로 작품 수리를 보냈다. 당시 수복 작업을 했던 재불 원로작가 김기린 화백은 "작품 자체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힘이 느껴져, 삼개월간 작업실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수리했었다"고 밝힌바 있다.
그렇게 되살아난 '독'은 오랫동안 '이우복 컬렉션'에 속해 있다가 2000년 발행된 장욱진 전작 도록에 실렸다. 1940년대 작품중 희귀한 초기작으로, 장욱진의 개성과 독창성이 잘 드러난 역작으로 평가받았고, 47년만인 개인 수장고에서 나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의 유통기한은 거꾸로 간다. 지난 5년간 장욱진의 그림은 355점이 경매에 나와 262점 팔렸다.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약 90억원의 매출로, 낙찰총액 10위를 지키고 있다. 이는 서울옥션·케이옥션 등 국내 미술품경매사 10여 곳에서 거래한 낙찰가를 분석한 결과다.
이같은 내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K-Artprice(k-artprice.newsis.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 현재까지 팔린 262점중 장욱진 최고가 작품 TOP 10를 집계했다. (그래픽 참고)
▲1.장욱진 독1949캔버스에 유채45.1×37.7cm 7억 서울옥션2017.03.07
▲2.장욱진나무와 새와 모자 1973캔버스에 유채26.5×34.2cm 3억4000만원 서울옥션2017.11.09
▲3.장욱진두 인물1959캔버스에 유채40.5×31cm 3억, 서울옥션2018.09.12
▲4.장욱진 월목1963캔버스에 유채53.5×38cm 3억, 서울옥션2017.04.26
▲5.장욱진 들1974캔버스에 유채33×24.6cm 2억5809만원 서울옥션 홍콩2016.11.27
▲6.장욱진 나무와 새와 모자1973캔버스에 유채27.3×34.8cm 2억5000만원 K옥션2019.03.20
▲7.장욱진 가족1973캔버스에 유채17.5×25cm 2억4500만원 K옥션2015.03.10
▲8.장욱진나무1986캔버스에 유채34.8×24.2cm 1억9000만원 K옥션2017.08.30
▲9.장욱진길1987캔버스에 유채35×35cm 1억8500만원 K옥션 2015.07.14
▲10.장욱진아침1986캔버스에 유채45.5×23.2cm 1억6500만원 K옥션2017.12.12
★장욱진 관전 포인트:작품은 10호(53×40cm) 이상의 크기가 없다고 할 정도로 '작은 그림' 일색이다. 2017년 같은 해에 낙찰된 2점 중 5호가 3억4000만원으로 2위를 차지한 반면, 10호 작품은 3억으로 4위를 차지했다. 물론 같은 해 다른 5호는 1억9000만원으로 8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경매 낙찰가 10순위를 작품 크기에 따라 분석해보면 2호 1점(7위), 4호 1점(5위), 5호 4점(2,6,8,9위), 6호 1점(3위), 8호 2점(1,10위), 10호 1점(4위) 등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소품들만 있다 보니, 크기의 작은 차이나 화면의 구성미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일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장욱진 소품의 위력은 지난 2011년 1월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장욱진 20주기'전에서 보여줬다. 7억에 팔린 '독'도 이 전시에 소개됐었다.
미술시장 유행을 잘 타지 않는 대표적인 작가로, 지난 5년간 낙찰총액 10순위 안을 지키고 있다. 작품의 유통량도 적당하고, 꾸준한 스테디셀러로 분석됐다. 다만 장기적으로 불황이 지속되는 영향으로 낙찰기록의 등락폭은 있다. 낙찰기록 상위 10순위 중 반복 세일을 통해 2위와 6위를 차지한 1973년 작품 ‘나무와 새와 모자’의 경우, 2017년에 비해 2019년에 9000만원 정도 떨어졌다. 하지만 이처럼 짧은 시기에 리세일 한 경우엔 소장자의 사정이나 경매 조건, 한정된 경매장의 고객 구성 등에 따라 낙찰 기록이 차이를 보일 수도 있다.
작품가격은 작가의 연령대에 따라 편차가 큰 편으로 나타났다. 50대 중반이었던 1970년대 초중반 작품의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지난 5년간 상위 10순위에서 70년대 50대 중반에 그린 작품은 4점(2,5,6,7위)이다. 이 시기 작품의 공통점은 단란한 가족상을 그렸다는 점이다. 따뜻한 느낌이 감도는 서정성이 돋보인다.
지난 5년간 국내법인 경매에서 9건이 최고가로 낙찰돼 내수시장에서 매우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옥션이 5건(1~5위) 이중에 5위는 서울옥션 홍콩법인이다. K옥션도 5건(6~10위)를 기록했다. 상위 5순위까지 서울옥션에서 낙찰, 하위 5순위는 K옥션에서 낙찰된 것을 보면, 경매시장에서의 장욱진 작품가 낙찰기록은 서울옥션의 완승인 셈이다. 2017년부터 연이어 높은 낙찰기록 5건(1,2,4,8,10위)을 세웠다. 2018년에 3위, 2019년에도 6위를 기록한 점을 감안할 때, 상위 10순위 중 무려 7건을 기록한 셈이다. 최고가 낙찰이 세워진 2017년은 가나문화재단에서 장욱진의 탄생 100주기전을 개최한 해로, 결국 작가 마케팅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느냐도 낙찰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2017년 가나문화재단이 마련한 장욱진 탄생 100주기 기념전때 장녀 장경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경운박물관 관장)는 "사실 어머니는 이 그림을 썩 좋아하지 않으셨다"며 이야기를 전했다.
"어느날 어머니가 그랬다. '다른 화가들은 부인 초상화를 잘도 그려주는데 당신은 왜 내 그림을 한번도 그려주지 않느냐'고 했고, 이 말에 들은 척도 않던 장 화백이 불현듯 덕소로 가 어머니 초상을 그려왔다. 아버지는 당시 불경읽는 어머니를 본 뒤 일주일간 작업에 열중했다. 춥고 혹독한 덕소에서 진진묘를 그린후 서울로 올라와 석달을 앓았다. 그 때 어머니는 '이거 하나 그려놓고 나와 인연을 끝내려는 건가'라는 생각도 하셨다고 한다."
부인 이순경 여사는 서울대 교수도 마다한 채 '자유인'으로 살았던 '0점 남편'의 곁을 지키며 자식을 키워냈다. 장녀는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술도 대단했다"면서 "식구들이 다 굶어죽게 생겨 결국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나섰고, 우리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도 어머니 덕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여사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 서점을 열고 30여년 운영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출판문화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을 설립, 후원한 이 여사는 "장 선생이 준 큰 선물은 전시회였다"고 기억했다. "전시회 날짜를 결혼기념일 또는 내 생일 근처로 정했었다"며 '츤데레 남편'의 사랑법을 알렸다. 올해 100세를 맞은 이 여사가 지난 5월 '진진묘'를 표지로 한 에세이에 공개했다.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 경성 제2고보에 입학하지만 일본교사의 왜곡된 행동에 항의한 끝에 학교에서 쫓겨났고, 스무살이던 해에 겨우 양정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림 공부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집안 어른의 질책을 받아 수덕사에서 정양(靜養)을 해야만 했다. 거기서 만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1886-1948)으로 부터 “좋은 화가가 되겠다”는 칭찬을 들었다.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수상을 계기로 집안 어른의 후원을 받아 1939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취직하여 전시팀에서 재직하며 2년간 일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54~1960)로 근무했지만 6년 만에 작품 창작을 위해 사표를 냈다. "화가에게는 문장이 있을 수가 없다. 단지 내 그림과의 대화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1963 서울을 떠나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의 한강가에 화실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혼자 그림과 술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생전 “그림에 동서양이 있을 수가 없다”며 먹그림도 그렸다. 수안보시대 (1980-1985)로 작가의 말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수묵화적 경향의 절정기를 보여준다. 오랜 유화작업을 통해 다져지며 그려온 형태들이 일휘필지의 순발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됐다. 먹물의 농담과 붓의 움직임, 결의 모양에 따라 모필의 일회성을 표현, 장욱진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새벽 3시엔 항상 일어나 그림을 그려요. 그림을 그리다 재미가 없으면 붓을 놓고 4년 전 내가 제작한 초당인 관어당에 나와 잉어 먹이를 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이 시간 그림 구상을 하지요."(1979년 4월 장욱진의 말)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라고 말하던 그는 1990년 12월 27일, 73세로 타계하기전까지 그린 721점을 남겼다. 평생 자연과 더불어 살며 동화 같은 마음을 간직한 그의 삶의 태도가 녹아 있는 작품은 2014년 4월 개관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 모여 있다. 장욱진의 호랑이 그림 ‘호작도’와 집을 모티브로 지어진 '하얀색 미술관'은 중정(中庭)과 각각 방들의 독특한 구성으로 2014년 김수근 건축상, 영국 BBC 위대한 8대 신설미술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장욱진 화백의 작품 가격은 뉴시스가 국내 언론 최초로 개발한 작품가격 사이트인 'K-Artprice(k-artprice.newsis.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시스가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MOU를 맺고 선보인 작품가격 사이트에는 국내 경매사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국내외 주요작가 200명의 작품가격을 제공한다. 작가당 5년간 거래 이력이 담긴 2만2400점의 가격을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다. 10만원에 거래된 이중섭의 황소 판화부터 김환기의 85억3000만원짜리 붉은 점화까지 작품가격이 총망라되어 있다. #클릭☞ K-Artprice(k-artprice.newsis.com)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